산책로에서 우연히 발견한 벚꽃을 필름 카메라로 남겼다. 소중한 기억을 현상하는 필름처럼 우리도 삶의 힘이 될 순간들을 눈에 온전히 담아보는 건 어떨까? 제공=김유빈씨
산책로에서 우연히 발견한 벚꽃을 필름 카메라로 남겼다. 소중한 기억을 현상하는 필름처럼 우리도 삶의 힘이 될 순간들을 눈에 온전히 담아보는 건 어떨까? 제공=김유빈씨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 내가 참 좋아하는 문장이다. 그리움은 인간이기에 향유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이자 최고의 형벌이다. 어떤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어 그리워하든, 이미 지나간 선택을 후회하든, 우리는 현재에 갇혀 있는 유한한 존재다.

그리움은 후회일까. 그리움이 후회라면 나는 조금 억울할 것 같다. 사랑스러운 그 기억을 그리워하는 만큼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해 과거에 남으려는 사람이 될 테니 말이다. 나는 내 그리움을 과거의 잘못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리움은 기억의 그림자일 뿐, 불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움에 잠식되어 현재를 저버리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하지만 이걸 알면서도 현재를 지키는 건 꽤 어렵다. 무의식적으로 행복에 점수를 부여하고, 기대하던 것에 미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더’ 행복했던 옛날을 그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그리움이 후회보다는, 이제는 불가능한 순간의 나를 향한 질투라고 생각한다.

“너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 친한 친구에게 물어본적이 있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 글쎄, 딱히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없는 것 같아. 너는 있어?” “나는…” 정적이 흘렀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없다는 친구의 말에 내가 지나온 날들에 질척거리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앞으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계속 뒤를 돌아보는, 미련 많고 유약한 사람. 나는 그리운 것들이 많은 사람이다. 향수와 기억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걸 오매불망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아침에 걸어가다가 본 특이한 모양의 구름, 기분 좋은 바람의 향기, 좋아하는 친구의 눈빛, 소중한 사람의 응원, 부드러운 고양이의 촉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 새벽의 파도 소리처럼 내가 떠올리는 순간들은 우연적이고, 순간적이고, 사소하지만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행복이다. 일상이 힘들어서 한숨을 푹 내쉬다가도 나를 기쁘게 한 기억에 기대어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그리워할 순간이 많다는 건 그만큼 행복했고 행복할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리움은 어쩌면 덧없는 감정이고, 그저 과거의 기억을 재건하는 하나의 의미 없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처 알지 못한 ‘행복’을 발굴해 낸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생긴다. 그러니 과거에 머무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도망치려 하지 말자. 광활한 우주에서 순간의 생을 살다가는 작은 존재가, 행복한 찰나를 연장하고자 하는 건 정말이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혹 유한한 시간에서 최대의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리울 순간을 선물하고 싶다. 그 사람들의 연장선에 내가 있고 싶다. 잔인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리울 만큼 최고의 순간을 선물하는 것, 그리움의 일부가 되는 것만큼 용기 있는 일이 없다. 기억은 한 번 깨지면 되돌릴 수 없는 조각과도 같아서 그 흔적은 지우고 싶다고 지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오랜 시간 머무는 일이다. ‘나’라는 사람을 시간에 새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를 스스로 삶과 주변인의 기억을 조각하는 조각가라고 칭하고 싶다. 모든 기억을, 모든 순간을 신중하게 조각해야 한다. 한 번 깎아버린 부분은 다시 붙일 수 없고 붙이더라도 금을 남긴다. 조각하는 순간에는 훗날 이 조각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여느 예술 작품이 그렇듯 걸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탄생할 것이다.

시인 윤성택은 이렇게 말했다.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은 아름답다 / 그런 추억일수록 현실을 누추하게 관통해야 한다 / 모든 기억은 추억으로 죽어가면서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밋밋하다고 느낀 하루가 평생을 살게 할 빛나는 기억이 될 수도 있고, 지금의 고통이 곱씹는 청춘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 마음 놓고 현재를 사랑하자. 우리가 등한시하는 오늘이 나중에 갈망하게 될 그리움, 추억, 행복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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