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학기 종강 날, 책상 위에 있던 빈 몬스터 캔 10개를 치웠다. 종강 전 마지막 5일 동안의 총 수면시간은 4시간이었다. 이쯤 되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들 생각 첫 번째, ‘왜?’ 안타깝지만 몬스터 10캔을 마신 장본인도 그 이유를 모른다. 두 번째, ‘미련하다’ 동의한다. 다시 세 번째, ‘근데 진짜 왜?’ 왜 그렇게 살았을까? 작년 말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떠올려보면 응급실에 실려 가지 않고 지금 멀쩡히 ‘그땐 그랬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주변에서는 나더러 ‘갓생’을 산다고들 했다. 그냥 벌인 일이 많은데 좀 과한 책임감과 쓸데없는 완벽주의적 집착이 그에 비례해서 대충하거나 중간에 포기도 못하고 데드라인들에 질질 끌려만 다니는 삶이 ‘God 生’이면 신도 할 게 못 되겠다 싶었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학보 미디어부 활동과 영상, 코딩 동아리 2개와 과외 2개와 전공 강의 7개를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 스스로를 던졌다. 사자가 자기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던데, 나는 나 자신을 절벽에서 밀었다. 영문도 모르고 떨어진 나는 절벽을 오르겠다고 하루걸러 하루는 밤을 새웠고 고카페인 음료는 나의 무기였다.

다시금 유효한 질문은 ‘도대체 왜 그랬냐’는 것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쉴틈 없이 바쁘게 살면 내가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버티다 보면 성장하게 되어있다는 흔한 ‘동기부여 명언1’ 같은 말을 남들보다 필요 이상으로 믿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겠다고 욕심부렸을 땐 이렇게 자존심 다 내려놓고 패배자 같은 글을 쓰고 있을 줄 몰랐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아집을 버리고 생각보다 내가 약했다는 걸 인정하겠다. 잠을 자는 게 사치인 삶을 대략 1년 동안 지속하니 연말쯤에는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에 부쳤다. 한 번은 중간고사 하루 전 벼락치기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아무것도 못하겠어서 해 뜰 때까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 시험이 마지막 시험도 아니었고 종강까지는 2달이 남은 시점이었다는 것이었다. 종강까지 무슨 정신으로 버텼는지 모를 정도로 그저 해치우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쌓이는 일들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의 퀄리티는 점점 낮아져 내 성에 차지 않았다. 공부든, 시험이든, 과제든, 영상이든, 글이든, 코딩이든, 과외든 하나같이 내가 만족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고 할 만한 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친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니가 뭐 대단한 거 한 거 있다고 약한 소리야? 니가 지구라도 구했니?’ 실제로 나는 지구를 구하진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었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머리를 한 세 대 정도 치고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자기연민은 독이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순간, 도태되어 남들도 불쌍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인생이나 살게 되는 것이라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생각해왔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기학대를 하라는 뜻은 아니었다는 걸, 자기학대를 실컷 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 사자들은 자기 새끼를 결코 절벽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한다. 사자가 주로 서식하는 지역에 절벽이 있는 지형이 드물뿐더러, 사자들도 자기 자식은 소중하다는 걸 알아서 떨어뜨리기는커녕 실수로 절벽에서 떨어진 새끼 사자를 어미 사자가 절벽 밑으로 뛰어 내려가 다시 물어오는 사진까지 있다. 자식의 미래와 성장을 위해 절벽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한다는 어미 사자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절벽에서 밀었던 내가 이제는 절벽을 내려가 바닥에 있을 나를 데려와야 할 차례였다. 어떻게 해야 데려올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나는 갓난애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바닥에 내려와 보니 이건 어미 사자도 아니고 새끼 사자가 새끼 사자를 민 꼴이라는 걸 깨달았다. 옛날 같았으면 ‘1시간 만에 절벽 오르는 방법’ 같은 걸 고민 했겠지만 이제는 시간과 꾸준함이 가진 힘과 중요성을 안다. 세상에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얻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고, 대체로 그런 것들이 사는 데 있어서 무너지지 않는 기둥이 된다는 걸 조금은 알았다.

다시 봄이다. 요즘 나는 몬스터를 마시지 않는다. 적어도 2시 전에는 잠을 자려고 노력한다. 할 수 있을 만큼만 일을 벌인다. 나의 방을 청소하고 꾸민다. 엄마께서 정성스럽게 싸주시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챙긴다. 아침 수영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수영장에 갈 때는 자전거도 탄다. 작고 색이 없는 그림을 그린다. 동네에 단골 카페도 만들었다. 나는 절벽을 오르는 방법을 차근차근 찾아나가고 있다. 언젠가 내가 절벽에서 다시 떨어졌을 때 기꺼이 절벽 밑으로 내려가 나를 데려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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