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은(사회생활학과·00년졸)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역콘텐츠진흥팀 팀장
이혜은(사회생활학과·00년졸)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역콘텐츠진흥팀 팀장

본교 사회생활학과를 2000년에 졸업하고 동대학원 한국학과에 다녔다. 논문 학기에 논문 쓰기 싫어 시험 삼아 써본 첫 번째 이력서가 덜컥 붙는 바람에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입사해 어느새 21년째 근속 중이다. 콘텐츠라는 말이 낯선 시절, 회사명을 이야기하기 싫었는데 한국 콘텐츠 산업이 성장하면서 이제 귀찮게 회사명을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

‘읽어야 산다’ 원고를 의뢰받고 ‘내가 써도 될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서점을 운영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책과 가까이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어느새 업무를 위한 참고자료용 책과 쉬는 날 머리 비우기용 웹소설 외에 책 한 권을 독파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책뿐만 아니다. 명색이 ‘대한민국 콘텐츠 산업을 육성한다’라는 회사에 다니고 있건만 영화관에 가본 지도, 공연장에서 공연을 즐겨본 지도 오래인 뜨뜻미지근한 삶을 살고 있다.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향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사실 대학 시절 중앙도서관만큼 많이 갔던 곳 중 하나가 바로 학교 앞 만화방이었다. 만화책도 책이니까, 그리고 마침 그 시절 가장 가슴 뛰게 만들었던 만화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돼 흥행을 거두고 있다기에 그 이야기를 해보자 싶었다.

다들 짐작하듯이 ‘슬램덩크’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이자 한국의 농구 붐에 한몫 단단히 한, 만화는 안 봤어도 강백호, 서태웅이란 이름은 누구나 다 아는 그 작품. 사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농구 문외한인 양아치 고등학생이 짝사랑으로 인해 농구부에 들어가 전국대회에 나가며 전개되는 이야기.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가 그 시절 우리 모두의 가슴을 뛰게 했다. 농구 하나에 온몸을 불태우는 캐릭터들의 뜨거움에 끌리고, 경기 하나하나 모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에 끌려, 31권의 단행본을 밤새 읽게 했다. 슬램덩크 속 아이들이 그러하듯, 내게도 뜨겁게 불태울 무엇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기대하게 했다.

슬램덩크의 출판은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이전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인지도 몰랐고, 일본 영화나 음악을 공식적으로 접할 수 없었다. ‘러브레터’와 같이 재밌다고 소문이 난 일본 영화는 학교 인근 영화 카페나 교내 시네마테크의 상영회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고, 일본 음악과 만화 역시 알음알음 찾아 감상해야 했다. 정식 수입되지 않은 해적판이나, 정식 출판되더라도 이름이나 지명을 다 한국식으로 바꾼 작품들만 볼 수 있었다. 슬램덩크도 마찬가지였다.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강백호로, 루카와 카에데는 서태웅으로 이름이 바뀌어 출판됐다. 당시 슬램덩크 한국판을 연재하던 만화잡지사 직원이 작명한 이 이름들은 만화 속 캐릭터의 이미지에 너무 잘 맞아 계속 쓰여 이번에 상영된 영화에도 그 이름으로 자막이 달렸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후, 슬램덩크로 대표되는 다양한 일본 대중문화는 내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큰 고민 없이 입사한 회사에서 그 호기심은 더 큰 고민으로 바뀌었다. 왜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가. 우리가 그들과 경쟁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외 만화 전시회에서 다들 한국 만화도 ‘망가’라 하는데 우리 ‘만화’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아직 ‘콘텐츠’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던 2000년대 초반, 이러한 고민으로 튼튼한 내수시장을 가진 일본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강백호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치열하게 업무를 익히고, 산업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열정에 불타올랐던 시절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굳이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한국의 콘텐츠 산업은 많이 성장했다. 한국이 처음 만들어낸 ‘웹툰’이라는 말은 이제 전 세계 만화업계에서 쓰이는 단어가 됐고,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성공 요인을 찾기 위해 회사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열정은 천천히 식어갔다. 옅어지는 자긍심,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로운 미열의 삶을 살게 됐다. 슬램덩크의 다음 이야기를 왜 안 그리냐는 인터뷰 질문에 “이제 그 뜨거움이 와닿지 않을 것 같아 못 그리겠다”라던 이노우에 작가의 말처럼, 나에게도 그 뜨거움이 당혹스러울까 싶어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슬램덩크 영화 보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오늘,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슬램덩크 만화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때만큼 뜨겁지는 못해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게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그게 강백호가 질문한 ‘영광의 시대’이고, 나는 그 영광의 시대를 맞이해본 적이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망설이지 않고 언제든지 슬램덩크 만화책을 펼칠 수 있다면, ‘내 영광의 시대는 지금’이라고 말할 만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 글을 읽을 당신에게도 바란다. 청춘인 당신에게 이 순간 영광의 시대가 지금이길.

이혜은(사회생활학과·00년졸)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역콘텐츠진흥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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