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대에서 사회학과로 진입한 후, 첫 전공 수업으로 고전사회학이론을 수강했다. 고전이라 불리는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의 이론을 원문으로 읽으며 관련된 생각을 나누는 수업이었다. 사회학의 기초가 되는 수업이고, 유명한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신청했다. 다만, 영어강의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들뜬 마음을 가지고 수강한 첫 번째 전공 수업에서 영어의 벽을 맞닥뜨렸다. 하고 싶은 말은 잔뜩이었다. 그러나 한국어로도 읽기 어려운 저서를 영어로 읽고, 해석이 잘 되지도 않는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영어강의의 한계에 부딪혔다. 내 머리 속의 생각을 영어로 술술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교수님의 말을 영어 듣기 시험 보듯 따라가기에 바빴다. ‘사회학’보다 ‘영어’를 공부했다. 

그러면서 이 강의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수업인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학생들은 졸업하기 위해 일정한 양의 영어강의를 수강해야 하고, 교수들은 임용 후 일정 기간 영어강의를 개설해야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교수자들은 내용 전달을 위해 국어 강의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대학에서 영어가 떠받들어지는 사이, 영어는 학생들 사이에 선을 그었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그의 책 ‘진격의 대학교'(2015)에서 “소수의 특별한 학생들만 혜택을 누리는 영어강의는 국제화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화된 학생들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역할만 할 뿐”이라고 말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영어계급사회에서 영어강의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학보사 방학 교육을 받으며 관련 내용을 취재했다. 단순한 영어강의를 넘어서, 영어로 학문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취재를 통해 만난 인문학자들은 입을 모아 “비영어권 사람이 영어로 학문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양적 자료 위주로 논리를 펼치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 다르게 인문학은 언어가 사고 전개의 중심이 됨에 따라 그 한계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대학이 세계화 추세를 따라잡기 위해, 대학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영어 논문을 과도하게 우대하면서 학자들에게 영어 논문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왜 대학 공동체에서 이런 문제의식들이 크게 논의되지 못하냐는 질문에 한 학자는 “한국 사회에서 세계화 흐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짐에 따라 학자들이 침묵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학자들의 시도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설득력 없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학생과 교수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대학의 ‘영어 숭배’는 글로벌 역량 강화라는 허울뿐인 목적을 내세운다. 대학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기꺼이 배우고 기꺼이 가르치려는 데에 있다. 학생의 이해와 학문의 발전을 뒤로하고, 세계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세상의 당연한 흐름이라고 말할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거센 물살에 맞추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리고 한국의 대학들은 변화하는 그 흐름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한 명의 대학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본질을 잃어버린 물살을 따라 무작정 흘러가고 싶지는 않다. 잠시 멈추고 ‘대학'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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