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이 삶을 지탱한다.' 내 주변에는 이 말을 실감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를 밥보다 자주 찾는 친구, 책을 달에 열 권은 읽는 친구, 좋아하는 마음이 밥 먹여준다는 친구.

나도 그 중 하나다. 나는 좋아하는 게 정말 많다. 쉴 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취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다.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고, 밤에는 영화관을 자주 찾으며, 종종 드라마를 보느라 밤을 꼴딱 샌다. 집에서는 요가를 하고, 여름에는 수영과 스쿠버다이빙을, 겨울에는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위해 짐을 챙긴다. 휴일에는 잠으로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고,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 수많은 이야기 사이에서 나는 최근 미술과 미술관에 유독 혹닉된 상태다. 처음에 미술관을 어떻게 찾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서 마땅히 할 게 없었고, 교양과목의 과제를 위해 박물관에 방문해야 했고, 여행을 가면 유명한 미술관이 있었다. 작품을 보다보니 또 보고싶은 작품이 생겼다. 그렇게 자꾸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에는 서울 부암동의 한 미술관에 다녀왔다. 처음 가본 공간이었는데 작품도 공간도 여운이 짙게 남았다. 집에 와서도 자꾸 생각이 나서 그 다음날 같은 작품을 보러 같은 미술관을 다시 찾았다. 할 일이 쌓여 있었지만 급한 일만 해치운 채 노트북을 어깨에 지고 버스를 탔다. 전시를 본 후 들어간 카페에서 노트북만 들여다봤고, 집에 돌아와 늦게까지 할 일을 했음에도 만족스러웠다.

내가 경험하는 미술관은 항상 현실과 조금 떨어진 느낌이다. 미술품과 함께 공간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있다.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세상사에 시끄럽고 복잡했던 마음과 머리가 유일하게 텅 비워지고 차분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 느낌이 나를 미술관에 더 머물도록 붙잡는다. 

꼭 도피처 같다. 이곳에서는 버겁게 느껴지는 삶을 잠시 뒤로 미뤄둘 수 있다. 그 감각이 유독 힘든 날이면 미술관을 떠올리게 한다. 이 현실과 동떨어진 곳으로의 도피는 내가 다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준다.

우리는 아주 취약하다. 끊임없이 현실에 얻어맞고 쉽게 흔들리고 무너진다. 원치 않는 일은 삶과 삶 주변에 자꾸 일어난다. 그런 세상에서 중요한 건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 길을 걷는 법을 아는 것이다. 도망치는 것은 회복의 일환이고, 다시 걷기 위함이다. 마음과 몸에 ‘회복탄력성’을 장착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그 '도망'에 삶을 빚진다. 분명 도망친 곳에서 다시 현실을 살 힘을 얻기도 하며, 도망친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도망이 새로운 삶의 변곡점이 되는 것이다. 

도망치는 건 꼭 포기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잠시 쉬는 것, 지금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보는 것, 지금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해보는 것. 그리고 때때로는 포기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처방일 수 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은 항상 모든 것에 용감히 마주하기를 요구한다. 도망친 사람을 나약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고 모든 순간을 똑바로 마주하는 삶이 몇이나 될까, 분명 우리에겐 각자의 도피처가 필요하다.

심야 영화를 보려, 미술관에 가려 자꾸 집을 나섰다. 행복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돌아와 다시 마주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문제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처럼 삶에 등 돌려도 괜찮을까, 해결하지 않고 자꾸 도망치는 게 맞을까 생각했을 때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도망친 곳에서 마주하고 해결할 용기를 얻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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