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건널 때는 손을 들고, 토요일 아침에는 항상 같은 번호로 로또를 산다.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만나면 줄줄 외울 때까지 보고 매일 밤 애니메이션을 자장가 삼아 잔다. 배달음식이 소울푸드고 외출보다는 역시 침대가 좋다. 이런 나의 멋진 일상을 우리 가족은 B급 인생이라 부른다.

B급의 사전적 정의는 딱 자기 앞가림은 해도 자랑하기는 힘든 보통 수준의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딱 내 인생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닐까. 그럭저럭 굴러가고 별 하자도 없지만, 타인의 시선에선 어딘가 한심한. 그렇지만, 그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이런 일상이 나는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사회가 만든 규칙을 벗어나지 않지만, 사회의 모범적 규범에서는 살짝 어긋난 인생은 꽤 편안하면서 특별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렇다면 잘 사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사실 모든 사람이 그 답을 안다. 이상적인 도착지를 향해 높은 목표를 갖고 항로를 쉽사리 벗어나지 않는 삶. 주변인들이 별나다고 말하는 내 삶에는 올 수 없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테다. 이를테면, ‘꿈’과 ‘야망’. 충동적이고 B+만 맞아도 다행인 내게 그들의 평가는 오히려 소름 끼치게 정확하다.

내게 ‘꿈’이라는 키워드는 특히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정상인의 사고로 이해하기 힘든 살바도르 달리의 뒤틀린 그림들처럼. 꿈이 없다고 해서 마냥 대충 살지는 않는다. 그저 열심과 대충을 반복하며 살아갈 뿐이다. 어느덧 대학을 입학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 보통의 또래들이 하듯 인턴을 했다거나 공모전에 나가진 않았고 개그동아리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마저 말아먹었다. 그렇다고 학문에 충실한 삶도 아니었다. 정치관과 철학에 대한 고찰보다는 네이버가 점쳐주는 오늘의 운세가 더 궁금한 샤머니즘형 인간일 뿐이므로.

그런 나와 어울리지 않게 학보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벌써 23번의 취재 촬영을 했다. 23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말 저마다의 인생의 축이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 우리가 만난 사람마다 이뤄낸 목표와 성과가 있고 또, 헌신하는 직업이 있다는 게 질투 날 정도로 축복으로 느껴졌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저 멀리 북극의 떠다니는 빙하 같았다. 언제 녹아 심해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판에 지도와 나침반조차 없다는 게 처음으로 불안했다. 인터뷰 마지막 질문으로 취재기자님들이 항상 묻는 게 있다. ‘자라나는 업계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대답은 언제나 비슷하다. ‘안된다는 생각 말고 뭐든 꾸준히 해봤으면 좋겠다.’ 솔직히 너무나 뻔한 말 아니겠는가. 이미 본인은 해답을 얻었으니 저런 말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할지, 대체 뭘 하라는 건지 밤바다처럼 까마득하게만 다가왔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카메라는 만지지도 못했다. 차라리 자퇴가 빠르겠다던 재봉틀로 이제는 미싱을 하고, 차라리 죽는 게 빠르겠다던 운전면허를 따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꿈은 설정하는 것이 아닌 찾아가는 것. 인생의 마스터 플랜 따위는 없는 나 같은 B급도 하다 보면 뭐라도 될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어느새 뿌리를 내렸다. A급처럼 수작, 명작은 아니어도 B급은 그들만의 개성이 묻은 웃음 코드와 자유로운 전개가 있어 멋있다. 따라서, 행운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헤엄치는 내 인생에도 멋이 있다. 어디로 흘러갈지, 어디에 닿을지 모르는 미정의 영역은 늘 신비로운 개척의 공간이 된다. 다만, 지금까지 스스로 잠가 둔 제한구역이었을 뿐.

아빠는 술에 취하면 지겨운 일장 연설을 끝내고 꼭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열창한다. 어릴 때는 그런 아빠가 마냥 귀찮고 싫었는데 머리가 크고 보니까 맞는 말이었다. 내 인생은 내가 즐겨야 한다는 것. 어찌 보면 내 인생의 모토가 결국엔 아빠의 조기교육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아빠와 나는 항상 주변인들로부터 대충 산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곤 했다. 그렇대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인생을 즐기고 또 은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인지를. 그저 내 멋대로 삶을 응원하며 조용히 걸어갈 뿐이다,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건 어쩌면 발밑이 투명해질 때까지 빙하가 사르르 녹아 움직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바다에 풍덩 빠져버릴까 봐 겁도 나지만, 녹아야지만 답이 나올 수도 있다. 목표지점도 방향도 아직은 모르지만, 멋대로 항해하다 보면 우리는 콜롬버스가 될 수 있다. 빙하가 녹은 물을 타고 흘러 어두운 바다가 끝나고 나타나는 초록색 미지의 땅을 찾아, B급들이여 침몰하지 말자. 신대륙을 발견할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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