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기반으로 한 대하드라마가 TV를 가득 채우고 있다. 으리으리한 기와집 앞에 화려한 꽃가마가 내려서는 장면이다. 다홍빛 저고리 치마를 입은 한 남자가 가마에서 사뿐 내려, 주름진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권위 있는 모습의 여자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드린다. 가마 옆에 선 여자 호위무사는 흉터투성이인 맨 등을 자랑스럽게 드러낸 모습이고, 시종 소년은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다 무사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한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역사 드라마가 있나!’ 사람들이 화면을 부술 기세로 들고일어난다. 지상파 TV 프로그램의 민원 게시판이 드라마 촬영 중지 요청 글로 도배되기 시작한다. 역사에 기록된 사실을 무시하고 나아가 왜곡까지 하는 이야기는 기만일 뿐이라며 역정을 내는 글이 늘어난다.

기록이란 것이 그렇다. 어떤 이야기가 역사로 정의되면 이는 뒤집을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된다. 2022년에 여성 인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도, 과거에 차별적인 유교 사상이 우리나라의 중심이었으며 여자가 오랫동안 2등 시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일어난 일이며 이를 없는 일마냥 눈 가리고 아웅 할 수는 없다. 시대극에서의 파격적인 역할 변모가 불가능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판타지 장르는 과거의 사실과 관계없이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 읽은 많은 모험 이야기에서 세상을 위협하는 괴물을 무찌르고 값진 보상과 명예를 얻는 사람, 혹은 숨겨진 혈통과 힘을 되찾고 왕좌에 앉는 사람은 내가 될 수 없었다. 무한한 상상력이 무한한 힘이 되는 장르지만, 그 많은 주인공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나와 다른 선상을 달렸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소년의 입장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옆에서 보상이나 장식을 연기해야 하는 소녀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참 여러 장르를 전전하며 다녔다. 내가 진심으로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까 오랜 시간 고민했다. 주인공과 나의 괴리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히 이야기를 감상하고 싶다는 열망이 이뤄질 수 없을 것 같던 즈음, 공상 과학(SF)이라는 행성에 다다랐다. 공상이란 것은 매우 편리하다. 개인의 상상은 사회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관습과 정반대의 발상이 훨씬 파격적이고 참신하다 여겨진다. 앞선 이야기들에 대한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쏟아낼 수 있다. 성별이 뒤집힌 사극도 어떤 미치광이 과학자의 실험실 속에서나 코스모스의 평행 세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 SF는 단순히 과학적 사실만을 나열하여 미래의 더 나은 기술력을 광고하던 폐쇄적인 장르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에 대한 인문학적인 고민을 함께한다. 강자의 세계에서 소외된 약자들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갈 수 있는 물꼬가 트인 셈이다. 장르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 즉 모두의 평등과 구시대의 관습에의 탈피, 소외된 자들에 대한 조망을 따라 이야기 속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던 이들이 드러난다. 그렇게, 우리는 여태껏 보이지 않던 자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거세고 폭력적인 목소리들에 묻혀 숨죽여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콘텐츠가 우리의 무의식에 미치는 힘은 강렬하다. 무의식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강력하다.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도, 앞서 나간 발자취가 없다면 그 생각은 그저 바람에서 그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허구나 공상이더라도 주인공으로서 활약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단 한 권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것이 그리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님을 몸이 기억하게 된다. 그 기억이 우리의 삶에 남아 자취를 그리고 길을 잇고 끈질긴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상 속 파도를 끊임없이 탐험한다. 나도 언젠가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중심에 우뚝 선 모습을 닮고 싶어서. 이 지면을 빌려, 내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 준 재미있는 SF 소설 몇 가지를 추천한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는 인류의 격변을 대표할 사이보그로 자원하여 별안간 자신의 꿈을 좇아 깊은 바다 아래로 잠적해버린 여자를 만날 수 있다. 김보영 작가의 ‘얼마나 닮았는가?’는 우리가 미처 벗어나지 못한 세상의 가림막을 영리하게 꼬집어준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가부장제 신화를 기반으로 건국된 나라를 무너뜨리는 시원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앤디 위어의 ‘아르테미스’에서는 주인공의 모험적인 행보를 함께하며 스릴 넘치는 달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악역이든 선한 역이든,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든 나는 여전히 더 많고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원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얻지 못한 자리를 동등하게 채우려면 아직도 한참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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