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strong>출처=영화 스틸컷
출처=영화 스틸컷

귀족 엘로이즈와 화가 마리안느, 두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미 두 차례 본 작품이지만 이번 재개봉으로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원래 줄거리를 아는 영화는 다시 잘 안 보는데, 이 작품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좋아서 여러 차례 관람하게 되었다.

첫 번째로는 두 주인공의 감정선을 보여주는 연출이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보는 마리안느와 그런 마리안느를 돌아보는 엘로이즈. 자신만이 모델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당신이 나를 쳐다볼 때, 난 누구를 쳐다보겠느냐"며 자신 또한 마리안느를 지켜봐 왔음을 이야기한다. 감독은 둘의 시선이 서로를 향함을 잘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는 마리안느가 바라보는 엘로이즈의 모습이 주로 나왔다면,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서로의 시선에서 본 상대방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서로의 작은 습관들을 알아내며 이를 얘기하는 장면은 둘이 얼마나 관심을 가진 채 서로를 바라보고,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르페우스 신화의 색다른 해석과 이에 대한 연출도 감독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왜 오르페우스는 뒤돌아봤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마리안느는 연인이 아닌 '시인', 즉 예술가로서의 오르페우스의 선택을 강조하지만, 엘로이즈는 "에우로디케가 뒤돌아보라 말했을 수도 있지 않겠냐"며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환영을 보고 뒤돌아보면 환영이 사라지는 연출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것, 그리고 둘의 이별 장면에서 엘로이즈가 떠나는 마리안느에게 뒤돌아보라 말하는 장면은 마리안느가 오르페우스를, 엘로이즈는 에우로디케를 상징함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초상화를 완성하면 엘로이즈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리안느가 계속해서 그린 것도, 그가 '시인' 오르페우스처럼 '화가'로서 예술가의 선택을 한 것임을 나타낸다.

시대적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는 엘로이즈는 이 작품의 매력을 배로 만든다. 신분제 사회를 배경으로 함에도 수녀원이 평등해서 좋았다던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라고 얘기하고 이를 실천한다. 자수를 두는 하녀 소피와 포도주를 따르는 화가 마리안느 옆에서 가장 바쁘게 식사를 준비하는 귀족 엘로이즈의 모습은 적극적이며 실천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남성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영화의 주요 특징이다. 여성 성소수자 영화로 범위를 좁혀도 남성 인물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캐롤’과 ‘아가씨’는 남성 인물을 빼버리면 내용 전개가 안 된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중요하게 등장하는 남자가 없다. 마리안느의 아버지는 화가라는 점, 엘로이즈의 약혼자는 밀라노 사람이라는 점만 제시된다. 소피를 임신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엘로이즈의 아버지는 누구인지에 대해선 언급 자체가 없다. 하지만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불편한 마음 없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비발디 사계 중 ‘여름’의 연주를 들으며 울음을 억누르다, 터뜨렸다, 미소를 지었다, 다시 울음을 억누르기를 반복하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끝이 난다. 둘이 함께 있을 때 마리안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며 ‘여름’을 짧게 연주했다. 이별 후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기억하며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곡의 연주를 직접 들으러 가고, 이를 마리안느가 보게 되는데, 영화 내내 잔잔했던 음향은 이 장면에서 갑자기 거세게 나온다. 이 음악은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와 대비되어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고, 예술을 위해 이어졌던 둘이 예술을 통해 서로를 기억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가장 인상 깊은 엔딩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화면구성과 음향, 섬세한 연출, 불편한 요소 없이 쓰인 이야기, 탄탄한 배우들의 연기까지, 어느 요소 하나 빼놓을 것 없는 영화다. 볼 때마다 섬세한 디테일과 복선들을 하나씩 새로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화면구성과 음향을 통한 정서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 꼭 영화관에 가서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마리안느의 대사처럼, 이 영화를 ne regrette pas, souviens-toi(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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