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머피의 법칙이 성립할 때가 꼭 있다. 등교할 때 종종 나는 이 법칙을 체감하곤 한다. 내 앞에서 건널목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버스가 떠나가고, 강의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일쑤. 성미가 워낙 급한 사람이기에, 우연으로 연달아 발생한 시간적 지연을 허용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런 불운의 징크스가 생길 때면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눈앞에서 무언가를 놓치는 병’이 있다며 자조적인 농담을 늘어놓는다.

약 5개월 전, 꽃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완연한 봄이었을 때다. 내 불평이 무색해질 만한 일이 찾아왔다. 명동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본가에 가기 위해 항상 타던 경기도 직행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예상 도착 시간은 약 40분 후. 늦어도 15분 뒤엔 항상 도착했던 버스였기에 그 수치를 보곤 두 눈을 의심했다. 내 몸은 캐리어와 짐으로 가득했고, 서서 버스를 기다릴 여력조차 없었던 나는 잠시 정류장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인고의 시간 끝에 도착한 버스는 만원(滿員). 그렇게 몇 번의 버스를 허황하게 보내버리다 약 1시간 30분 만에 내 몸을 겨우 버스에 실었다. 집에 도착해 엄마 말을 들어보니, 장애인 이동권 지하철 시위로 서울 전체 교통이 혼잡해졌기 때문이란다.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머리가 하얘져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나는 그동안 이동에 매사 불편을 겪었을 장애인들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내가 참지 못했던 고작 몇십 분이라는 시간은, 평생 고통의 시간을 겪는 이들에겐 정말로 사소한 것이었다.

잠시 겪었던 불편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서서히 보이게 만들었다. 올해 여름, 뮤지컬을 관람하러 광화문의 한 대극장을 갔던 적이 있다. 평소엔 공연을 즐겁게 보고 나왔을 테지만, 그 광활한 공연장에 장애인석은 고작 1층 맨 뒷줄의 10석만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마주하곤 맘 편히 공연을 보기가 어려웠다. 기숙사를 나와 엘리베이터 타워 앞 내리막길을 걸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전공수업을 들으러 포스코관을 갈 때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길이지만 휠체어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미끄럼 방지판이 있긴 하나 인도의 폭이 좁고 경사가 매우 가팔라 이동하기 위태로워 보였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난 발달장애를 앓은 학우도 떠오른다. 나는 이 친구의 학급 도우미를 자처했고, 한번은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의 집 거실에는 그가 직접 그린 추상화로 가득 차 있었다. 당장 미술관에 걸려도 손색없을 정도로,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린 그림이라곤 매우 뛰어난 솜씨였다. 그림을 설명하는 그의 빛나는 눈동자가 아직도 선명하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은 이 친구는 언론에 몇 차례 인터뷰도 할 만큼 나름의 유명세도 있었다. 당시 휠체어가 있다는 사실도 아예 잊어버릴 정도로 그가 행복하게만 보였는데, 지금 회고해보면 내 생각이 매우 짧았음을 느낀다.

아직 눈에 밟히는 요소들이 많지만,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2021년 12월부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수십 차례 벌인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는 약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장연 시위의 시발점 중 하나는 2021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교통약자법 개정안이다. 도로의 구조나 시설이 저상버스 운행에 적합하지 않을 경우 필수적으로 저상버스를 도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규정과, 특별교통수단에 설치되는 비용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이 아닌 ‘지원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이 그 골자다. 이 조항들은 이동권 예산 편성의 실효성에 의문을 남긴다.

장애인 이동권 개선 문제를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린 건 작년 전장연의 시위지만, 이동권 투쟁은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사건이 기점이었다. 약 2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휠체어를 타고 버스나 지하철에 탑승하는 장애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인구가 결코 적은 것도 아니다. 한국 장애인 등록인구 수는 약 264만 명. 전체 인구 약 20명 중 1명꼴로, 한 번쯤 스쳐 지나갈 법할 수치다. 기이하게도, 이들을 길에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어려운 대중교통 접근 가능성에 있다. 이들이 한번 집 밖을 나가려면, 보통 사람들은 함부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준비가 수반된다. 이동하는 매 순간이 이들에겐 휠체어를 덜컹거리며 장애물을 넘어야 할 도전이다.

장애인들은 집단의 이방인처럼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특히 시위 혐오는 이동권 문제를 넘어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투영된 씁쓸한 현실을 반영해 무섭다. 지독한 편견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온당히 인정받을 수는 없을까. 엄청난 제도적 개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이들이 시위를 열어 우리 일상에 빗금이 가게 한 것도 그 이유다. 휠체어의 힘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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