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령 디자인하우스 부사장
김은령 디자인하우스 부사장

본교 영어영문학과를 1994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디자인하우스에서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 ‘럭셔리’ 편집장을 거쳐 현재 부사장직으로 일하고 있다. 호프 자런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을 비롯해 30여 권을 번역했다. 쓴 책으로 『밥보다 책』 『바보들은 항상 여자 탓만 한다』 『비즈 라이팅』 등이 있다.

책은 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 놓고 생각나면 읽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수많은 책이 새로 발행되다 보니 엄청난 기대를 받는 베스트셀러 후보가 아니라면 초판은 2천 부 미만으로 찍는다. 책이 인기를 끌지 못 하면 추가 인쇄는 없으니 말 그대로 한정판이 된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를 구하기 위해 중고서점을 뒤지고 인터넷 경매까지 살피며 전전긍긍했던 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드는 책은 일단 보일 때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좋다.

사 놓고 다 보는 것도 아닌데 짐밖에 더 되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사들인 책의 상당수는 언젠가는 읽게 돼 있다. 방바닥에 누워 빈둥거리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라는 책등을 보고 내가 이런 스릴러 소설을 사뒀던가 싶어 펼쳤다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강력한 페미니즘 산문에 깜짝 놀라 일어나 무릎 꿇고 읽은 적도 있다. 서가에 잔뜩 꽂아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노려보며 “은퇴만 해봐라, 모두 읽어버릴 테다” 하고 전의를 다지는 순간도 즐겁다. 저 책을 다 읽을 자신이 없어 은퇴를 슬금슬금 미루고 있긴 하지만.

그저 책에 담긴 내용이 필요하다면 전자책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는 친구들의 말에는 “충전을 안 해도 되니 엄청 편리해”라고 맞받아친다. 물론 유행을 타는 실용서나 웹툰이야 전자책으로도 보지만 꼭 종이책이어야 하는 순간도 많다. 디지털 데이터로는 근사한 서재를 꾸밀 수도, 들고 다니며 나의 안목과 취향을 자랑할 수도 없다. 럭셔리의 원뜻은 필요 이상의 호사를 부린다는 것 아닌가. 읽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 없는 상상 속 이야기, 검색 몇 번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굳이 두껍고 무거운 종이 더미에 담아 책장에 꽂아두고 가끔 들춰보는 것보다 더 럭셔리한 게 있을까? “오! 필요를 따지지 말라”는 리어왕 대사처럼, 원래 인생의 어떤 부분은 효용이나 효율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사둔 책을 다 읽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읽은 책을 다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이해하기 쉬운 책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니고 어려운 책이 다 훌륭한 것도 아니다. 학생 때 이해할 수 없던 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고 “아, 이게 이런 의미였어!” 하고 즐거워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 책도 사람처럼 시절의 인연이 따로 있다. 재미있으면 계속 읽으면 되고 재미없거나 잘 이해가 안 되면 잠시 접어두고 다른 책을 읽으면 된다. 그러라고 세상에 책이 그렇게 많이 출간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세상 모든 게 귀찮아지고 나 자신에 실망할 때가 생긴다. 문제와 당당히 맞서는 게 좋겠지만 때론 도망쳐야 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땐 책 속으로 도망치는 편이 제일 낫다. 대단한 답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화집 속 아름다운 그림 하나, 짧은 시 한 편이 뻣뻣해진 어깨를 만져주고 무협지 속의 허세 가득한 대사, 만화책의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우울함을 조금 날려준다. 그 덕에 기운을 얻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이런 책의 효용을 소개하려고 이 칼럼에 ‘읽어야 산다’, ‘Read to Live’라는 이름을 달았겠지만 나에게는 ‘Read to Buy’가 먼저다. 어떤 전투를 벌일지 모르는 장수가 무기를 잔뜩 갖춰 놓는 것처럼 언제 어떤 문제를 만날지 모르고 어떤 책으로 위로받을지 모르니 일단 책을 많이 사두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화여대에, 정확히는 이화여대 도서관에 빚을 지고 있다. 공강 시간, 약속이 펑크 났을 때, 비나 눈이 와서 돌아다니기 싫을 때 도서관 열람실 책상에 엎어져 잠을 자기도 했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으며 낯선 서가 사이에서 온갖 책 구경을 했고 가끔 열심히 책을 읽었다. 등장인물이 하도 많아 메모해가며 박경리의 ‘토지’를 읽었던 곳도 도서관이었다. 쾌적하고 조용하며 당시로는 드물었던 완전 개가식 도서관에서 예상치 못했던 넓은 세상을 만났다. 학생 시절, 얼마든 길을 잃어도 괜찮고 그 어떤 기이한 생각을 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좀 더 용감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책과 도서관의 효용을 온몸으로 경험한 나는 모두가 탐을 낼 희귀본 장서를 갖춰서 언젠가 모교에 기증하겠다고 혼자 감격하며 결정해버렸다. 음… 첨단 도서실을 갖출 학교에서 반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학교와 잘 상의해볼 일이다. 문제 해결 방법이야 찾으면 얼마든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책을 통해 배웠으니까.

김은령 디자인하우스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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