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딸기(1957)

<strong>출처=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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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던가. 키르케고르의 명언을 곱씹으며 우리는 삶을 돌아본다. 사람은 언제 절망하는가?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혹은 사랑이 떠났을 때? 이런 사건은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주지만, 절망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삶을 흑백으로 만드는 냉담한 마음이야말로 절망의 친구다. 그 마음은 결국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옥죄는 사슬이 된다. 

여기 한 노인이 있다. 의학자로서 평생 명망을 떨치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아름다운 아내와 장성한 아들까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롭다. 매사에 냉담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을 때조차 대수롭잖게 여길 정도다. 그 차가운 심장엔 아무것도 담지 못한 채 외로움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자위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던 그는 기묘한 꿈을 꾸게 된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고요한 날. 길을 따라 걷던 노인 앞에 마차가 길쭉한 상자를 떨어뜨리고 간다. 다가가 상자를 바라본다. 고동치는 심장 소리. 상자가 열리고 늙고 파리한 손이 나온다.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이윽고 침묵. 노인은 뒷걸음질 친다. 그 상자는 바로 자신의 시신을 담은 관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마주한 노인은 몸서리치며 꿈에서 깨어난다.

이 영화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어느 날 노인은 유년기에 묵던 여름 별장에 들르는데, 정원의 풀숲에서 자신의 첫사랑이 소녀 시절 모습 그대로 산딸기를 따는 환영을 마주하게 된다. 젊은 첫사랑을 바라보는 노인의 복잡미묘한 표정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후에도 수많은 환상이 등장하며, 노인은 현실의 늙은 모습 그대로 한옆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이러한 교차는 단지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넘어 특별한 효과를 가져온다. 사람이 현실에 몰입하다 보면 재물과 안위에 매달려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잊기 마련이다. 이에 감독은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보여줌으로써 작은 죽음을 맛보여준다. 요컨대 죽는 대신 삶 한가운데에서 환상을 봄으로써 삶의 유한성을 상기하도록 한다.

이기적인 냉혈한이 죽음을 선구한 뒤 깨달음을 얻는 서사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구조이다. 유명한 예시로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43)이 있다. ‘산딸기’와 ‘크리스마스 캐럴’ 두 작품이 꾸준히 칭송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계속해서 삶의 본질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이라고 믿는 무게에 짓눌려 소중한 것을 놓치고, 나르시시즘적인 냉정을 갑옷 삼아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나 자신만을 향한 메아리는 공허하다.

요즘 유행하는 키워드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소확행’, ‘플렉스’, ‘욜로’, ‘자존감’, ‘독신’ 등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로 수렴하는 어휘가 즐비하다. 언어는 정신을 반영하고, 다시금 그 언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우리는 참혹한 결말을 예견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고등동물다운 죽음, 집단 자멸이다. 지나치게 똑똑해진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덕목에 호소하기보다 손익계산으로 갈음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똑똑한’ 삶인가?

우리는 외로운 삶을 원치 않는다. 사랑함으로써 손해를 입기가 두려울 뿐이다. 작중 노인의 아들은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절규한다. 나를 이 세상에 묶어놓을 이유를 더 만들고 싶지 않다고. 사실 그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해서 무엇이든 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만 거듭한다면 자신의 결정으로 삶이 이루어졌을지언정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가까워져 올 때 인간은 다급히 반성하는 것이다.

영롱하던 열매도 시들고, 우리의 나날은 언젠가 저문다. 그러니 겁도 없이 사랑하자. 그러나 오직 나만을 위해 사랑하지는 말자. 내 중심부를 향한 골몰은 결국 나를 파헤쳐 공허한 구멍을 남기고 만다. 다만 풀숲에 흐드러진 산딸기를, 가시풀을 헤치다가 짓이겨버린 그 소박한 열매를 그러안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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