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스승의 날’이 돌아왔다.

금년에도 수업시간의 내 탁자 위에는 카드와 케이크 상자가 놓여 있었고, 학생들을 어김없이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로 시작하는 노래를 나를 위해 불러주었다.

가사 내용이 너무나 황송해서 그 긴시간동안 내내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라 쩔쩔맸다.

언제부터인가 ‘스승의 날’전후 며칠은 몹시 피곤하다.

아침 등교하는 초등학생들가지도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민망하고, 교수들 연구실에 여기저기서 꽃바구니가 배달되는 것도 딱하다.

그러다가 며칠 수 그 화려했던 꽃들이 처참하게 쓰레기통에 수북히 버려져있는 모습을 보게되는 지경에 이르면 청소해주시는 분들의 짜증까지 느껴져 피곤이 더해지낟. ‘스승의 날’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얘기를 하자는것이 아니다.

용돈을 쪼개고 없는 시간을 내서 선물을 마련한 학생들이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더구나 졸업한 지 오래된 제자가 나를 특별히 ‘스승’으로 기억하고 성의를 다해값비싼 꽃바구니를 보내오면 누군들 반갑고 기쁘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 모든 일들이 전국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현사이라는 데 있다, ‘스승의 날’을 위해 전국적으로 지출되는 엄청난 꽃값을 한번 생각해보자. 왜 유치원새부터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들이 꼭 ‘스승의 날’에 한꺼번에 선생님들께 감사해야 하는가? 감사의 표시에는 왜 반드시 꽃이 따라야하는가? 왜 이 날에는 스승의 은혜가 하늘같다는 똑같은 노래가 교실마다 울려야하느가? 진실된 인간의 정서는 개별적이고 조용하고 은밀한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아름답고 응집된 정서일 때는 더욱 그렇다.

다른해와 똑같이,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의례히 부르는 똑같은 노래를 단체로 불러주는 그것 보다는 언젠가 내가 무심히 했었을 말 한마디가 당시에 여러가지로 삶이 힘겨웠던 자신에게 힘이 되었다는 고백을 ‘스승의 날’을 계기로 용기를 내어 뒤늦게 한다는 편지 한 통이 훨씬 큰 감동을 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길었든 짧았든 간에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고, 나의 삶이 더 좋아지도록 영향을 주었던 선생님을 더듬어 찾아서 그 추억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해되삭임해보는 것. ‘스승의 날’의 본질은 이런것이어야 한다.

거기서 그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까지 지니고 있다면, 그 선생님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이 축복받는 것이리라. 내게도 그립고 보고싶은 선생님이 한분 계시다.

30여년쯤 전의 조그만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 시골 초등학교 교사이시기도 했던 천사 같았던 선생님. 이상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 분의 조용한 미소 뿐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한,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 그지없는 미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자신이 형편없이 초라하게 느껴졌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고 괴로웠을 때, 그럴 때에 마음 속 깊은 밑바닥에서 살며시 떠오르는 그 미소. 그것은 순식간에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내 마음을 꽉 채우고, 나는 곧 위로받고 평정을 되찾게 되어 내 스스로도 놀랄때가 많았다.

그 선생님이 살고 계신 곳을 소식으로 들어 알지만, 나는 아직 어떤 연락도 선생님께 드린 적이 없다.

‘그리움’을 좀더 아끼기 위해서,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꼭 선생님을 찾아뵈야 하겠다.

‘스승의 날’이 아닌 조용한 날에, 꽃다발 없이. 이 글을 끝맺으려는데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30년 후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마음 속 깊이 그리워해 줄 내 제자가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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