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활을 간다는 가슴 뿌듯함보다는, 3학년이나 돼서 처음 가는 농활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게다가 인문대 감연마을 농활대를 이끌게 되니 더욱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감연마을은 본동과 다른 면에서 편입된 마을까지를 포함하고 있어 일곱명의 농활대원들이 활동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둘째날 오전에 시작한 호별방문에서 본동조차 다 인사를 못드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날 오전은 우리 농활대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호별방문과 함께 진행된 북한동포돕기에 대한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60대 이상 노년층이 대부분인 감연마을의 특성을 깊게 고려하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사전준비나 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체 반성과 함께 오후에 있을 근로활동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우리 농활대의 주된 근로활동은 고초모종을 옮겨 심는 것이었는데,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작업이어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여든이 되신 할머니가 그 넓은 밭을 일구시는 모습에, 우리 농촌을 지키는 농민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 전에 우리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재미있었다.

’,‘우리 농산물의 소중함을 느꼈다.

’,‘흙의 소중함과 자연의 신비함이 느껴졌다.

’는 등의 말보다 ‘너무 힘들었다.

’고 얘기하는 후배의 말이 어쩌면 더 정직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해야할 일들과 하면 안 되는 일들 사이에서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힘들 수 밖에 없는 활동이 아닌가. 더 깊게, 많은 것들을 느끼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고 뭔가 느낀 것을 정리하기에는 농활에 대한 나의 자세가 아직은 확고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단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정리할 수 없는 느낌이라해도 더 많은 학우들이 여러가지를 느끼고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농활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강미희(독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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