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과 교수의 농활 잠입기

안동역에서부터물어불어 용각마을을 찾았을 때에는 장대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역전수퍼에서 구입한 과자봉지와 선물꾸러미,그리고 수박 한 덩이가 우산때문에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과수원과 구추밭사이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몇채의 농가.그곳에 농활의 기척은 전혀 없었다.

아니, 사람의 기척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방금 돌아온 듯 한 꼬마를 붙잡고 누나들이 있는 곳을 묻자 녀셕은 마을 어귀의 처마가 넓은 집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눈에 익은 대자보.마을의 분위기와는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그 글씨체.바로 찾아왔음을 느끼며 안도한다.

농활지도교수....우리가 농촌활동의 무엇을 지도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여기에서 지도의 의미는 고된 작업을 하는 학생들의 위문, 마을 어른들에 대한 인사,학생들의 감독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들고간 선물꾸러미는 처음 두 가지를 위한 것이다.

비가 와서 누군가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거처에는 아무도 없다.

방에는 짐들이 쌓여있고 벽에는 일정시간표와 지켜야 할 수칙이 빽빽히 적혀 있다.

일정표에 따르면 지금 대원들은 마을 어른들을 방문하고 인사를 하는 중일 것이다.

수칙의 제1조는 시간엄수.그리고 식사당번은 30분전에 미리 와서 식사준비,그러나 식사시간은 이미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대개의 경우 첫날 하루쯤은 일정표의 시간을 따르는 법인데, 마루에 걸터않아 처마끝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린다.

슬그머니 시장기가 발동한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여섯명의 대원들이 들어오며 우리를 반긴다.

두팀으로 나누었는데 이웃마을로 간 나머지 대원들이 아직 안왔나며 오히려 의아해 한다.

그쪽셍 식사당번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장 여울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아마 첫발이라 몹시 바쁘겠지.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우선 몇 명에게 식사준비를 시킨다.

쌀을 씻고 반찬을 준비하는 부산한 움직인이 느껴진다.

짐속에 가득 보이는 라면상자들로 미루어 우리의 방문으로 메뉴가 바뀐 것을 아닌가하는 우려를 하게된다.

밥타는 냄새를 느끼고 문을 열어보니 학생 한명이 밥을 휘휘 젓고 있다.

신세대의 조리법은 좀 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식사준비가 대충 끝날 무렵 싸릿문 쪽에서 어수선한 발소리와 함께 윗마을 팀이 들어온다.

그런데 비에 흠뻑 젖은 그들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벌겋게 상기된 혈색, 그리고 이제는 숨결로도 느껴지는 알코올 냄새.여울이의 얼굴이 이내 창백해짐을 느낀다.

여울이는 나를 보고 어쩔 줄 모른다.

나는 여울이를 보고 어쩔 줄 모른다.

사연은 이러하였다.

마지막으로 들른 농가에는 병색 짙은 할머니 한분만 살고 있었다.

키워놓은 자식들은 모두 두시로 떠나버리고, 그녀는 마음의 아픔과 몸의 아픔 모두를 혼자서 삭이오 있다.

이제는 밥알 한톨 마저도 넘기는 것이 힘이 들어 그녀가 삼킬 수 있는 것은 소주뿐. 마음에 응어리진 한을 그녀는 서울서 온 학생들에게 모두 쏟아놓는다.

거푸 소주를 건네며,마음약한 여울이는 한잔 받고 홀짝이고, 한잔 받고 홀짝이고,변변한 안주도 없지만 할머니의 신세타령은 더없는 안주되어 알코올 성분을 온몸에 퍼뜨린다.

어쩌랴.그것이 농촌의 참모습인 것을.도시인들에게 버려진 우리의 고향.그 한쪽에 자식들에게마저 버려진 한 여인. 어쩌면 이것이 농활의 참된 의미일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의 괴리,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노력.어쩌면 그것이 풀 한 포기,사과 한 개 손보는 것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

사과 하나를 싸는 것처럼 한 사람의 마음을 쌀 수 만 있다면. 비에 펑 젖은 여울이를 옷을 갈아 입게 하고 옆방에서 쉬도록 한다.

휘휘 저어 만든 밥이 의외로 맛이 좋았지만, 밥알에 씹혀지는 앙금처럼, 마음 한쪽에 씹히는 것이 있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