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문 선생이다.

신학기 첫시간이 되면 나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이 시대에도 다시 글쓰기 인가, 왜 여전히 글쓰기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해준다.

그리고 한 학기 동안 써야 할 글의 목록을 학생들에게 적어 준다.

학생들은 일단 고행같은 글쓰기에 들어서고 있다는 자체에 조금 놀라는 표정들이다.

나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글쓰기는 모두 점수로 환산됨으로 결코 행복한 글쓰기는 아닐 거라고 말해준다.

학생들의 얼굴들은 일순간 더욱 굳어진다.

나는 이 여행은 힘들고 고달프지만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거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다음 시간에 어김없이 숙제를 해온다.

우리의 첫 번째의 과제는 지금가지 자신의 책읽기에 관한 경험적 고백과 반성적 고찰에 관한 것이다.

나는 학생들이 수능과 논술세대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그 전에 교과서 중심으로만 공부하던 세대와 어떻게 다를까 생각하며 그들의 발표를 경청한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발표를 들으며 수능공부가 글쓰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이해를 방해하는 또 다른 폭력적 제도라는 것을 느낀다.

‘수능 세대인 나로서는 언어영역이란 시험을 통해 시 읽기에 친숙해진 것을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하지만 수능이라는 것은 정독에 의한 글의 분석보다는 정해진 시간에 감이 오는 답을 찍는 것이 더 강조된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뜩이나 흥미 위주의 글읽기로 인해서 건성건성 책을 읽는 나의 버릇은 심화돼 갔다’(상경학부·1 은진), ‘문학수업에서 이루어지는 작품해석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잣대로 이미 해석된 것을 마기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앗고 나의 해석은 선생님의 방식과 언제나 일치하지 않앗다.

점수를 위해선 나의 해석같은 것은 묵살해야만했다’(상경학부·1 윤희) 나는 이들이 통과해 온 그 세계의 컨덱스트가 숫자와 스피드였다는 사실을 알고 짐짓 놀란다.

물론 현재에도 우리는 가공할 만한 그 숫자와 스피드에 지배당하고 잇지만 이들은 다이제스트로 한국세계명작선을 암기하듯 훑고, 긴 지문의 글도 가능한 한 눈에 주제를 간파하려 애쓴다.

독해 부분을 보면 먼저 형광펜을 집어들고 주제문을 찾아내는 데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자유로운 독서를 하리라던 그들이 다짐은 곧 벽에 부딪치곤 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은 사회과학 공부라는 또 다른 강박관념으로 바뀌게 되어 ‘억압’의 순환을 겪게된다.

이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이번 한총련 사건 때도 머리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대학생들의 말들과 사회에서의 말들이 천지차이로 달랐다.

나에겐 양쪽 모두 현실을 왜곡시키고 편파적인 시실보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후에 아예 외면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에 지금은 신문기사도, 학교 게시판에 있는 글도 읽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 ‘거창하고 절대적인 이론’을 알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상경학부·1 은영) 대학수업이나 학회에서 하는 책읽기와 글쓰기에서도 혼란스러움은 마찬가지다.

‘대학에 들어와 읽은 거라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수기>와 <이방인>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작가의 의도나 비판점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없이 글이 쓰여진 대로 읽었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오랫동안 주입식 교육을 받아서 내 자신이 스스로 글을 읽고 사고하는 능력을 상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쓰기에 있어서도 “서론·본론·결론은 각각 몇 자로 써야하고 예는 이러한 것을 들어 주는 것이 좋다”라는 식의 논술에 익숙해져서, 다른 유형의 글쓰기를 하게 되면 매우 당황하게 됐다”(외국어계열·1 동윤) 나는 학생들을 바라본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종생부에서 학생부로 끝없이 바뀌어 온 한국 교육제도에 잘 순응하여 여기까지 온 우월감과 동시에 느끼는 열등감. 경직된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꿈꾸어 보는 지적 갈망, 그러면서 1학기 때의 방황을 뼈아픈 반성삼아 2학기 때는 정말 ‘잘 ’살아 보겠다는 자기 다짐의 얼굴들.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를 끊임없이 의심해 보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는 여린 사고가 필요하다고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강요된 책읽기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창조적으로 책읽기를 해야 하며 그 책읽기는 우리의 삶에서 살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가장 가깝게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교실에서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의 눈빛이 순간 빛난다.

나는 나의 말이 또 하나의 확인화된 억압의 언어, 과시적인 공허한 말이 아니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말한다.

‘우리의 수업에서 단 하나만의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온갖 말과 글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함께 천짜기를 해나가는그런 수업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글 속에서 말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자기만의언어로 읽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작문은 곧 쓰기의 수업이라기 보다 읽기의 수업입니다.

쓰기에서 읽기로 그래서 나 자신을 정직하게 읽는 것, 이 세상을 겸허하게 들여다 보는 것,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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