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18일, 당시 내 나이는 여섯살이었고, 광주 시내에 살고 있었다.

여섯살 나이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시 모든 언론이 차단되어 있던 때라 집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돌아가는 상황을 정말로 알수가 없었던 때였다.

내가 보았던 것은 부모님 몰래 내다본 창문 밖으로 (부모님은 총탄이 날아올가봐 창문을 모두 닫고 이불을 대서 막아놓았다) 광주지역 청·장년들이 총을 든 채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과 이들 ‘시민군’에게 요쿠르트와 삶은 달걀 등을 가져다 주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이었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시민들의 환호와 함께 음식이 쏟아져 나오곤 햇다.

내가 ‘체험했던’ 광주항쟁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그 후 자라면서였다.

5.18 당시 군에 있었다거나 도청에 있었던 선생님들이 당시 상황뿐 아니라 쿠테타가 일어나게 된 배경까지도 흥분하여 말씀해주시고는 했고 음성적으로 유통되던 5.18기록비디오 테입이나 사진, 수기 같은 것을 구해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천명 가량의 사망자… 사실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까지 포함한다면 몇백명은 더 추가될 것이다.

중학교때 ‘광주청문회’라는 것이 열리면서 5.18진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려지기 시작했다.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뻔한 거짓말을 하던 5,6공 주역의 얼굴은 어린 나에게도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세월이 흘러 광주문제가 드라마로 방영되는 시대가 왔다.

물론 당시 처절하고 격렬했던 상황과 한목숨바쳐 광주를 지키려 했던 시민군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이제 5.18진상규명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라는 기대로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7월 검찰에서 내린 5.18책임자 처벌에 대한 불기소처분 결정은 전국적으로 특히 광주시민의 분노를 일으킬만 했다.

불기소처분의 근거는 ‘성공한 쿠테타는 공소권이 없다’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규탄하는 집회등에서 보여준 경찰의 무자비한 진입형태는 실로 현 정부가 5,6공 세력을 철저하게 비호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라고 이야기 했다 한다.

역사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잘못된 역사에 대해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정권이 역사를 은폐, 왜곡하려할 때 국민이 이를 묵과한다면 이는 자신도 모르게 동조한 셈이다.

쉽게 포기해버리고, 금방 잊어버리는 고질적인 ‘국민병’을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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