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시론 「12·12」와 인조반정 「12·12」라는 정치적, 군사적 사건에 대해 나는 별다른 지식도 갖지 못하고 , 말할 입장에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일에 대해 말을 하는데는 내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12·12」는 군인 사회 일각에서 밤중에 벌어진 하찮은 사건일 수도 있지만, 그 파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 사회전체에까지 미쳤다.

그 일을 계기로 무고한 백성이 수없이 살상되는 「5·18」이 일어났고, 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여 살벌한 군사통치가 10여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12·12」가 어느 특정분야의 관심사일수만은 없다.

하루 아침에 대통령이 되었따가 이유없이 그 자리에서 밀려났떤 최아무개에서부터, 길거리에서 아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삼청교욱이란 혹독한 고초를 겪어야 했떤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국민이라면 이 사건과 무관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나 나름대로 한마디씩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12·12」는 역사의 순조로운 물줄기를 억지로 뒤튼 「쿠데타적 사건」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사건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오래전의 일은 그만두고라도 가까운 조선시대에서도 그런 사례를 적지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나는 「12·12」와 「인조반정」이 여러가지 면에서 닮은 데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두 사건은 서로 닮은 점이 많지만 그 가운데 두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하나는 그것들이 다같이 뚜렷한 명분이나 절박한 이유가 없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폭정을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능양군 일파가 무장군인들의 힘을 빌어 일으킨 쿠데타였다.

광해군이 패륜아였다는 반란군들의 비판은 흔히 반정에 성공한 자들이 반대파를 몰아내기위해 갖다 붙이는 상투적 죄목에 불과한 것이다.

연산군도 그런 이유로 쫓겨났다.

연산군도 그런 이유로 쫓겨났다.

박정희가 장면을 무능하고 부패하다고 몰아세운 것이라든지, 신군부가 세 김씨를 부패한 정치인으로 매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다.

광해군은 비록 개인적 약점을 가지기는 했으나 통치자로서의 능력과 업적은 탁월한 데가 있었따. 집권 15년 동안 사고를 수리하면서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했고, 호패제를 실시했으며, 병기를 수리하고 성곽을 정비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외교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명과 청의 강대국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펴서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나라의 평화를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 반정이일어나야 할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굳이 반정의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굳이 반정의 이유를 찾는다면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서인 일파가 권력을 탈취하자는 일이었다.

이는 반정이 성공한 이후에 주모자들이 벌인 형태를 보면 명백해진다.

반정의 주역들은 자기네끼리 논공행상을 놓고 내분을 일으켜, 그들 가운데 하나인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는 당파의 이익을 챙기는 당파싸움이 나 일삼았다.

광해군의 도덕성을 문제삼은 그들이 보인 추태는 실로 가관이다.

인조의 후사 문제를 놓고 맏아들인 소현세자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고가는가 하면, 세자빈과 그 아들마저 무참히 살해하는 도덕적 패륜을 서슴지 않았다.

외교면에서도 그들은 당시의 국제 현실을 바로보지 못하고, 현실성없는 「반청친면책」을 내세웠다가 병자호란을 자초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고 나라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은 가당치도 않은 북벌정책을 편다고 수십년 동안 백성들을 못살게 들볶았다.

이렇게 허망하고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놓고 그 누구도 인조반정을 합리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명분없는 반정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그들이 광해군보다 나은 정치를 펼쳤다면 그런대로 반정의 당위성을 강변할 수 있었을 것이고,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그것을 추인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2·12」는 우선 뚜렷한 이유나 명분없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인조반정과 유사하다.

10·26 이후에 국민들은 유신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군부는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이 지도자적 자질이 없다느니, 부패했다느니, 하는 구실을 붙여 권력을 탈취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참모총장 에게 내란죄의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를 제거하고 권력찬탈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터무니없는 모략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이 매도하던 세 사람 가운데 한사람은 현재 대통령이 되어 있고 , 나머지 두 사람도 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참모총장에게 뒤집어씌웠던 내란죄는 조작이었음이 최근의 검찰수사에서 밝혀졌다.

인조반정이 서인 일파의 권력탈취를 목적으로 한 것처럼, 「12·12」는 신군부일파의 권력탈취가 주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12」가 인조반정과 닮은 점은 사건 이후의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신군부는 반란에 성공을 거두고 나서 광주사태를 일으켜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논공행상을 벌여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는 살벌한 군사독재를 연장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부정과 비리로 치부를 일삼으면서 권력연장을 획책했따.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후임자마저도 전임자를 산골짜기로 유배보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현재 그들이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벌이고 있는 호화판 생활태도는 그들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가 헛소문이 아님을 말해 준다.

불완전하게나마 문민시대가 와서 지난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가려내고, 역사의 왜곡을 바로잡게 된것은 그나마 인조반정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은 인정해도 기소도 하지 않고 처벌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보면서 우리의 정치 수준은 아직도 조선시대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하게 된다 . 결국 「잘되면 충신, 못되면 역적」이라는 우리 전래의 속담이 사실임을 다시 확인하고 만셈이다.

자기네 통치자를 욕해야 하는 국민은 불행한 국민이다.

우리는 한때 우리의 통치자였던 「12·12」주역들을 굳이 처벌하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명분만 있으면 그들을 용서하고 싶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면 미움도 사라지는 법이고,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싶은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12·12」의 주역들도 그들이 내세우는 대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것 한가지로도 인정해서 용서해 줄 밑천이라도 삼으려 한다.

이런 국민이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제라도 그들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억지 변명을 하지 말고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해서 우리 국민의 너그러운 이해심을 공손히 받들여야 한다.

그것마저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한대로「법대로」처리하는 길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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