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시인 연대로 본질 흐리는 언론위기 정국 김모교수는 강단에 서서 강경대군 치사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의 죽음이며 열사칭호는 천부당만부당」이라는 용감한(?) 발언을 하더니 3일자 조선일보 칼럼에서는 「그 결과야 어찌되었건 나라를 위한 숭고한 죽음」이라며 논조를 급선회하여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전투경찰과 대치하는 시위학생들은 언제까지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하여 경찰로 하여금 최루탄을 쏘고 또 쏘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요즘 제도언론의 공격무기인 양비론을 전개한다.

강경대군 치사사건 발발 직후부터 4월 30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무화염병 무쇠파이프」라는 제목으로 극렬 시위가 경경진압을 불러들인 진원지임을 시종일관 운운하며 대국민 선전을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다.

그리고 「명지대생 강경대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전경대원들의 무차별 폭행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지만, 좀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른바 「공격형 시위집단」이라는 경찰의 과잉대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사건의 의미를 협소한 공간으로 제한시키려 한다.

이에 대해 본교 휴웃길에는 「전경의 무차별 폭행=직접적 원인, 공격형의 시위진압형태=근본원인이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열사의 죽음이 알량한 펜끝에서 이리저리 요리되고 있다.

사태해결은 시위진압 형태의 적절한 변화로 이루어질 것이고 따라서 덜 폭력적인 진압이 열사의 죽음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보상책이 되어버렸다」는 대자보가 게재되어 즉각 비판에 나섰다.

아직도 사설은 계속된다.

「우리도 이젠 구미제국에서 볼 수 있는 시위문화를 뿌리내릴 때가 됐다.

그것은 곧 강군의 죽음에 대한 차원높은 보상책이 아닐까」라며 건전한 시위문화의 정착이야말로 문제해결의 종착역임을 강변한다.

그러나 7일자 사설에서 「정부가 이번에 마련한 집회·시위 안전관리 개선대책도 크게 기대할 것이 못돼보인다.

시위진압방식을 진압체포위주에서 안전해산위주로 바꾸고 속칭 「백골단」인 사법체포조를 제복경관으로 대체한다는 등의 새선책이 근본에 접근하지 못한 점부터가 그렇다」라고 스스로 포골하고 있는 바대로 민중에 대해 한치의 물러섬이 있을 수 없는 국가권력이 상존하는 한 건전한 시위문화란 개인의 소망을 허망하게 만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말은 결국 민중의 최소한의 저항수단마저 빼앗은 채 민중을 무장해제시켜 지랄탄으로 숨통을 조이고, 옷만 바뀐 백골단이 휘두르는 공건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앞에 민중을 맨몸으로 떠밀자는 얘기와 같다.

한편 5일자 조선일보에는 70년대 민중제판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지하씨가 「젊은 벗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소름끼치는 의사굿을 당장 걷어치워라…생명을 공경하며 그 생명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따라 끈질기고 슬기로운 창조적인 저항행동을 선택하라」며 강경대군 죽음 이후 잇따른 분신에 대해 마치 생명경시의 정박한 목숨버리기 행렬쯤으로 매도하고 나섰다.

그는 분신은 올바른 투쟁양식이 아니라 한다.

그렇다, 그럼 그는 우리를 죽음의 저항까지 치닫게 하는 국가권력의 타살행위를 극복할 다른 방식의 투쟁을 제안하는가? 그는 이 질문에 침묵한 채 단지 현재의 방법만은 안된다를 되풀이할 뿐이다.

9일자 조선일보는 내친김에 근거없는 허위보도조차 서슴지 않는다.

모대학 총장을 만나 급기야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억지논리까지 이끌어낸다.

그야말로 죽어간 이들의 분노와 변혁의지를 짓밟는 이러한 추측이야말로 인간생명경시의 단적인 예가 아닐까? 또한 9일자 조선일보는 「모든 투쟁을 원내로」라는 슬로건 아래 투쟁포기를 선언한 신민당에게 독자란까지 할애해가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신민당에게 광역의회선거에만 주력하여 지역당을 하루빨리 탈피하라고 부추긴다.

결국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교수, 박홍총장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가 정권의 여론호도책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무방비한 의식 속에 침투하고 있는 제도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위력과 그 치마폭에 가리워진 정권의 정체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여론매체부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