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31주년을 맞아
4월 혁명 31주년을 맞아
  • 이대학보
  • 승인 199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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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4·19혁명이 31주년을 맞는다.

지난 30년간 4월 혁명이 갖는 의미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4월혁명은 그것이 갖는 실천적 과제가 5·16군사쿠테타로 단절·퇴색되었기때문에, 그 진정한 의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었다.

특히 제 2공화국의 정치적 무능과 사회적 혼란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극복하였다는 군사혁명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에 따라 4월혁명은 그 역사적 성격을 상실한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학생혁명을 실천해야 할 장면정권이 너무도 단명으로 끝났기 때문에,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민족의 자주역량을 꽃피우지 못하고 말았음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 될 수는 없다.

이제 30년이 지난 4·19는 그 본래의 성격을 잃고 있다.

당시 필자는 대학 4년 재학생으로서 그 때의 상황을 되돌아 보면서, 미처 꽃피우지 못한 그때의 정신을 오늘에 비춰보는 동시에 그 혁명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한다.

나아가 30년전의 학생운동과 오늘의 그것이 갖는 차이를 통해 바람직한 학생운동의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우선 당시의 모습을 필자의 일기를 통해 먼저 소개하고 그밖의 표정을 살펴보자. 「4월19일. 맑음. 아침부터 서울시의 공기는 무척 긴장되어 있었다.

어제저녁 고대생 데모대에 깡패를 동원하여 저지시켰다는 소식은 학교분위기를 더욱 흥분시키고 있었다.

강의를 하시던 채희순 교수는 잔뜩 찌푸리고 있었으나, 우리들은 모두 밖으로 뛰어 나갔다.

나는 윤주열과 강양희(현재 경기도 교육위원회 장학관)와 함께 광화문쪽으로 갔다.

그때 성대생의 데모대가 한창 그곳을 지나고 있었고, 서울시내 전체 대학생들이 중앙청쪽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들은 길바닥에 주저 앉아「3·15 부정선거 다시하라」,「나라의 운명은 대법원에 달려있다」등을 따라 불렀다.

1시경에 스크럼을 짜고 경무대(현재의 청와대)를 향했다.

이어 최루탄이 마구 터졌다.

진명여고 일대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면서 바께스에 물을 날라주어 눈을 자주 씻었다.

1시 40분경 돌연 총성이 들렸으며, 우리는 어떻게 도망쳤는지 모른다.

길가의 어느 집으로 피한 것이다.

총소리가 그치는 순간 우리는 그곳을 뛰쳐 나왔다.

피묻은 옷을 들고 울부짖는 학생과 길거리에 넘어져 있는 학생들을 보았다.

부상자를 업고 뛰는 시민들도 있었다.

서울신문사가 타고 있었고, 광화문 파출소는 이미 다 타버렸다.

그때 일단의 성난 젊은이들이 트럭을 빼앗아타고 몽둥이를 흔들며 시내를 질주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한창 바뀌고 있었다.

」이 일기를 보면서 필자는 당시의 상황을 회상할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때 서울시민들이 학생데모대에 박수를 쳤고, 물과 수건을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4·19는 단순히 3·15부정선거라는 사실에서 야기된 것은 아니다.

역사의 모든 사건이나 운동이 그러하듯이, 4월혁명은 당시 사회의 누적된 모순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의 근대사는 두개의 큰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그하나는 의병전쟁이나 3·1운동과 같이 외세의 위협과 침탈에 대항하여 투쟁한 저항적인 자주의식과 민족적 독립운동의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오랜 전통사회의 굴레를 벗어나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개혁적인 창조의식과 민주적 전통의 추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해방이후 민족의 분단과 누적된 정치·경제적 모순은 이러한 민족사의 방향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때 우리 사회는 기존의 중앙집권적 전제정치, 자급 자족적 농업경제, 가부장적 권위주의, 그리고 보수적 유교사상체계를 벗어나지 못한채 외형적 현대사회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구·신사회의 요소가 여러겹으로 혼재되고 있어 많은 사회모순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정부는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위속에서 일부 재벌과 결탁되어 반공이라는 구실을 앞세워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출된 국민의「정당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마저 봉쇄한 것이다.

즉, 우리 국민 스스로 민주적 창조를 위한 자발적 기회를 막아버린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은 1956년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장면을 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었고(신익희는 선거유세중 사망), 1960년 제 4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로운 민주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성장한 것이다.

공명선거만 보장되면 독재정부도 갈아치울수 있다는 「민의」를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당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을 침해하면서 부정선거를 획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민중은 자각적 존재로서 자유권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가 된 것이다.

여기에 4·19의 필연성이 있다.

그러므로 4월 혁명은 권력층의 부정부패로 위로부터의 혁명이 불가능하고, 대중의 미성숙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불가능한 우리나라에서 진취적인 학생·지식인에 의한 옆으로부터의 혁명인것이다.

이는 학생·시민만이 아니라 민중의 지지로 성공한 우리 역사발전의 한 단계로서, 우리 국민의 민주적·자주적 역량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자유주의 실현의 민주혁명이고 경제적으로는 빈곤타파를 통한 자유경제체제 수립을 위한 경제자립운동이며, 사회적으로는 사회정의 구현과 식민지 잔재를 극복하려는 문화적 자각운동이다.

즉, 장면정권은 4월혁명으로 분출된 자유와 민주주의혁명을 계승할 능력의 한계때문에, 결국 그 혁명의 빛을 잃게 하였다.

다만 혁명의 주체세력인 학생들은 그 정신을 민족통일의 열기로 승화시키려 한 것은 큰 뜻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학생이 주체가 되어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4·19혁명등이다.

이러한 운동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사의 방향제시였다.

그리고 언제나 정치적 목적이 없는 순수한 운동이었고,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외세배척과 기성정치에 대한 비판을 특징으로 했으므로 항상 여론을 이끌어 주었다.

그것은 정치의 담당자가 아닌 비판자의 소리이며, 감시자의 요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언제나 시민이나 민중의 이익을 대변해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생운동이 지향하는 통일과 민주의 열기, 개혁과 비판의 목소리가 다수 학생의 외면과 사회적 불안으로 인식될때, 거기에는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학생운동이 추구하는 민주적 가치와 민중적 지향, 그리고 민족적 의미에 대한 창조적 변용과 바람직한 조절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신형식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