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숙 ­ 철학과 교수 매년 연중행사로 수천의 학생들이 이화를나가고, 또 그만큼의 새로운 얼굴들이 들어온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소중한 얼굴들로서 축하를 받고 앞길에 대한 축복을 받아야 겠지만, 왁자지껄 졸업식, 입학식을 치루고 적당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흘르는 물은 언제나 바뀌어도 강물의 모습은 변함없듯이, 사람이 바뀌어도 캠퍼스를 채운 학생들의 모습에서는 큰 변화를 느낄 수가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한다.

오늘이 있기까지의 여러분의 인내와 노력과 수면부족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자, 이제 어찌 할 것인가. 몇년간의 수면부족을 메꾸고도 남을만큼 잠을 자고나도 남아도는 시간과, 적당히 빼먹어도 크게 지장이 없는 강의시간, 특별히 신경써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 학점, 고등학교 담임선생님과는 달리 별로 간섭이 없는 교수,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데, 이것에 대처할만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자아는 확실치가 않다.

스스로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는 것 같다.

애초에 문제가 무엇이 있는지는 모를것 같고, 대강 알고 택한 것 같던 전공도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하고, 교양과목으로 꽉 채워진 시간표는 고등학교 때의 그것과 별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또래의 친구들과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떠들어대는 것도 싫증이 나고, 멋내고 미팅하는 재미도 시들해지고 어찌하면 좋은가. 대학에 들어오면 누구나 대강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20년 전 긴교복 치마를 벗어 던지고 미니 스커트를 입고서는, 다리가 너무 굵어 창피하다고 버스도 제대로 타지 못하던 친구와 비틀즈의 한명이 목이 찢어져라 「어머니」하고 외쳐대는 노래가 가득찬 다방을 쏘다니다 입학을 맞이했던 나는 적어도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대학 4년, 이 소중한 시간을 어찌 쓸 것인가를 신입생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생각해 보길 바란다.

누구나 지난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좋은 추억들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정신적 흡인력이 엄청난 젊은 대학시절을 헛되이 보내서는 더욱 안될 일이다.

이시기에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며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해야 하며, 기성의 것을 의심해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보는 실험정신과 보다 높은 곳에 도달하고자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

고뇌와 고통을 모르는 자는 결코 성숙해질 수 없으며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자는 결실의 기쁨과 의미를 모를 것이고 높이 오르지 못한 자는 멀리, 그리고넓게 볼 수 없는 까닭에 매 순간 직접 부딪쳐 얻게될 상처와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의 4년을 보다 큰 시작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잡고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책임을 지게 될 21세기의 모습이 어떠할 것이며, 전문여성으로 그 시기를 맞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가를 지금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막 처절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여러분에게는 잔인한 이야기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이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갖고, 대접을 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4년뒤의 졸업식은 여러분에게 하나의 공허한 연극무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여성들기리 모였을 때 갖게되는 안락함, 중요한 역사적·사회적 책임과 경쟁으로 부터의 면제, 이러한 것때문에 여자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편하다면, 그것은 참으로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러분이 이 사회에 발을 디딘 것은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짓눌림 없이 확인하고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보다 많이 확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도 같은 긴장된 의식과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는 정신을 가꾸어나가는 것이 대학인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이고, 그러한 우리의 노력으로서만 이화여대는 신부양성소가 아닌 참된 주체로 서고자 하는 여성들의 디딤터로 자리잡을 것이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이화여자 대학교 입학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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