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의 긴장감 속 힘과 용기주던 동지애

1986년 10월 28일 오후 1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의 발족식이 건국대 본관 앞 잔듸밭에서 2천여명의 학우들이 결집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지구별로 사전 집회를 갖고 결집한 학우들이 투쟁의지로 하나임을 다져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열기와 기세에 비하여 우리들의 발걸음을 막거나 돌려세우는 아무런 검문도 봉쇄도 없이 건국대 주변은 잠잠할 뿐이었다.

드디어 1시가 되어 본집회가 시작되고 선언문들이 낭독되었다.

「애학투련」은 미·일 외세에 종속된 정권의 비정통성과 부도덕성을 폭로하고 외세에 간섭받지 않는 진정한 민족자주권 쟁취 등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였다.

어느틈엔가 시커멓게 건대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전경과 사복경찰들에 의한 침탈이 진행되었다.

순식간에 적들과의 점전이 이루어졌으며 저들의 막대한 물리력은 우리들을 각 건물로 몰아넣었고 그때부터 사흘밤 나흘낮 동안의 치열한 대치와 투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준비하지 못한 「농성과 점거」였고 바깥의 많은 일들-가족에 대한 염려, 학교와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지만 극도의 긴장된 상황속에서 무엇보다 강한 힘과 용기는 바로 동지애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뼈속깊이 체독한 시간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 자신을 먼저 돌보기보다는 곁에 있는 친구를 생각했으며 모든 학우들이 한뜻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규율을 만들어내고 집단적 질서를 지켜나갔다.

이것이 헬리콥터와 방송, 회유전단 살포까지 동원한, 저들의 진압작전과 회유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들의 투쟁의 정당함을 확신하며 나자신과 동지를 지켜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

마지막날 사회과학관 옥상에서 검거된 과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끔찍하였다.

수많은 학우들이 화상을 입고 주위는 온통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로 뒤덮여 눈을 뜰 수 없었으며 사복경찰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곤봉, 발길질에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이 소방호스로 뿌려댄 물과 최루가루와 함께 뒤범벅되고 있었다.

머리 바로 위에서는 헬리콥터가 계속해서 돌며 사과탄을 던져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끌려갔고 우리들의 투쟁은 소위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폭력난동사건」으로 매도되어 연일 방송에 보도되었다.

「애학투련」의 투쟁은 그 성과보다는 한계와 오류가 더 많이 지적되는 투쟁이었다.

즉, 국민과의 공감대 형성과정 없이 선도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에 무모하게 비추어졌으며 투쟁에 참여한 한우들 역시 투쟁의 진정한 주인·주체로서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귀중한 교훈으로 「애학투련」의 투쟁은 운동발전의 역사에서 투쟁의 주인인 사람을 먼저 준비하고 그 사람의 지향과 요구에서부터 투쟁의 내용을 찾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덧붙여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여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이란 솔직하고 겸손하며 진실이 아닌 것에 용감하고 끝까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박애경(89년 독문과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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