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란 이름으로 불리며 산 지 20년째, 돌이켜보면 대학시절 한순간의 선택이 이처럼 인생의 길로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1983년 이화동산에 봄꽃이 피기 시작하던 어느 날, 강의실을 나오는 길이었다.

바로 뒷번호였던 과 친구가 학보 기자 선발 지원서를 내러 간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친구따라 시험을 보고, ‘무시무시한’ 면접을 보고 나니, 공교롭게도 나만 붙고 그 친구는 떨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32기 학보 기자생활은 내 대학시절의 전부가 됐다.

졸업정원제의 위협이 자살사건까지 빚던 시절이었지만, 강의실이나 도서관보다는 학관 지하의 골방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씩씩하고 당당한 선배들 덕분에 ‘이대학보 기자’란 자부심으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선배들이 투쟁 끝에 따낸 학생 편집국장제의 첫 임기를 맡는 바람에, 4학년 1학기까지 ‘학보사 귀신’이 돼야 했다.

자율화란 허울 속에 대학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이 어느 때보다 교묘했던 그 시절, 단어 하나 때문에 애써 만든 학보가 통째로 휴지로 버려지거나 인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팅조차도 사치이자 부도덕으로 여겨졌다.

‘광주’‘반미’‘독재’‘반역’ 등등 금지된 단어 한 개를 지키기 위해 밤새 시위 아닌 시위를 한 적도 많았다.

88년 <한겨레>와 인연도 학보 경험에서 비롯됐다.

처음엔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딛고 창간된 새 신문이었던 까닭에 선뜻 입사할 용기를 못내고 마음 속으로 짝사랑만 했었다.

그런데 한달 가까이 제작된 신문의 편집을 보니, 똑같은 순한글 가로신문인 이대학보의 편집경험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자신이 생겼다.

실제로 입사를 해보니, 대부분의 편집기자들이 한문 위주의 세로 신문에 익숙하거나 아예 편집 경험이 없어 애를 먹고 있었다.

이제는 국내 거의 모든 신문들이 한글 위주의 가로 편집으로 바뀐 것을 보면 <한겨레>의 선구적 시도에 동참했다는 자부심이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 시절 이대학보를 비롯한 대학신문은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서 제도언론을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매체로서 투쟁했던 까닭에, 내가 쓰는 단어 하나 제목 한 줄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기자정신의 뿌리가 내 안에 생겨났음을 지금도 커다란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따금씩 달라진 학보사 소식과 이화동산의 분위기를 전해 들을 때면 안타깝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기자 수련과정이 너무 힘들고, 학점 관리가 어려워 졸업 뒤 취직하는 데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 등으로 학생들이 지원을 아예 기피하거나 중도에 그만둔다니, ‘젊음을, 때로는 목숨까지 걸고 지키고자 했던 언론의 자유’가 이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일까.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믿고 싶다.

지금도 학보사 골방에서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밤잠을 아끼며 ‘원고지에 꽃다운 청춘을 싣고 있는’후배들이 있을 테니까. 이대학보 48돌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