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퇴촌면 원당리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아홉 분의 보금자리 "나눔의 집"에서 우릴 처음 맞아 준 것은 "대지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축 늘어진 나체를 드러내고 힘들게 땅을 디딘 채 반신을 땅속에 묻고 있는 상징 작품이다.

굵게 패인 주름, 거죽만 남은 것 같은 푸른 빛의 여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저렇듯 애처롭게 서있는 걸까. "그래, 왔나." 할머니들께 드릴 떡을 봉지채 들고 집에 들어선 우리에게 할머니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냥 눈인사 정도만 하신다.

바로 어제도 YTN, 오늘은 우리, 지난 10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영화 "낮은 목소리 1.2", "숨결" 촬영과 수 많은 신문, 방송국, 크고 작은 단체들이 오랜 세월 꾸준히 할머니들을 괴롭혀온 터라 우리의 방문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으신가 보다.

할머니들과 친해지기 작전으로 점심 준비를 돕고 설거지, 방 닦기 등 오며가며 할머니들께 말 붙일 기회만 찾앗다.

하지만 여기 떡도 효과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둘러보며 할머니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입구에 전시된 할머니들의 손도장 석고부조와 그 옆의 이름 석자. 쩡 하는 소리가 머리 속에 울린다.

같은 여성이니까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어줍잖은 생각들이 깨지고 있었다.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활동을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육성 증언을 통해 재현된 위안소 내부, 군인 클럽, 군인오락소, 위생적인 공중변호 등으로 불리운 위안소는 일본군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소비재에 불과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만큼 좁다랗고 차가운 돌덩이 위에 깔리 낡은 담요 한 장, 그리고 군인을 받고 나서 뒷물을 하기 위한 세숫대야와 양동이, 그게 전부였다.

군수품을 만들러 간다며 엄마 품을 떠나 이제 갓 열다섯, 여섯이 된 어린 소녀들이 하루에도 20~30명씩 군인들을 받아야 했던, 죽을때까지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흔을 남긴 감옥소보다 더한 차가운 위안소에는 그게 전부였다.

내 나이보다 한참이나 어렸을 소녀들이 그 차가운 바닥에서 짐승들의 성욕을 채우기 위한 성노예로 부림을 당했구나....그 억울한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10여년의 운동을 해도 아직까지 책임자 처벌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내가 쓸 단 한번의 글이 얼만큼의 도움이 될까 하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나눔의 집에는 손님들이 와 있었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로 활동하는 여성 철도공무원들의 모임인 JR 회원들이 견학을 왔다.

지난 한 달만도 120여명을 넘는 일본인들이 역사관을 다녀갔다고 하니 일본인들과 마주 앉는 일이 할머니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할머니들이 젊은 일본인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싶어도 만나는 것은 싫다고 하신다.

죄가 밉지 사람이 무슨 죄냐는 말은 아직도 생생히 선명하게 과거를 기억하고 있고 악몽으로 잠을 설쳐야 하는 할머니들께 너무 어려운 부탁인 듯 싶다.

역사관 앞 기념 촬영을 도와주다 잠깐 얘기를 나누게 됐는데 한 40대 JR회원은 같이 딸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너무 맘이 아프다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또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정부의 제재는 많다며 나에게도 "간바떼(열심히 하다)"한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청소를 하겠다며 할머니들 방으로 쳐들어갔다.

박옥련 할머니(83)는 아드님과 손주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이 할머니의 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위안부는 분명 강제적 징병임에도 여성 스스로 혹은 남성, 가족들에 의해 당연히 숨겨야 하는 일로 당연시돼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저녁준비를 하러 내려갔다.

사진 찍는 후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사진직지 말라고 막두리 할머니(78) 께서 뭐라고 그러신 모양이다.

"사진 함만 더 찍으면 때리쥑이뿔끼라." 금새 또 호통을 치신다.

덧붙여 하시는 말씀."느그 암만 찍어가도 바뀌는 거 하나 없다! 뭐할라꼬 직어가노!" 연신 사진만 박아가서 불쌍한 할머니들이라고 떠들기만 할 뿐 10년째 바뀐 것은 하나도 없으니 할머니의 마음은 이미 몇번이나 곪아 터지고도 남음이다.

할머니들을 두번째로 뵌 날은 433차 소요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1일(수) 교보문고 앞에서. 나오지 않을거라시던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모두 나오셨다.

자유발언 시간에 남성총등학교 6학년2반 아이들은 "할머니, 건강하시구요. 용기 잃지 마세요. 감기 조심하세요", "할머니들이 불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다.

또 함흥 출신이라는 한 할머니(82)는 "이걸 해결해서 원수를 갚고 죽으려고 살아있다"고 하셨다.

나눔의 집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그 후배가 오늘 또 눈물을 보였다.

"2천년 성노예전범재판"이란 문구가 쓰인 노란 조끼를 똑깥이 입고 일렬로 앉아계신 할머니들, 그 앞에서 연신 후레쉬를 터뜨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할머니들이 무슨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잖냐며 자기는 더 못 찍는다고 한다.

최근 일본의 민주당, 사민당, 공산당은 각각 일본군 위안부 배상을 위한 법아을 동시에 제출했고, 유고, 미국에서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소송이 진행 혹은 제기되고 잇다.

또한 올 12월 7일(목)~12일(화) 열리는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 (2000법정)"의 경우 남북이 공동 기소장을 작성하고,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피해 6개국과 일본 총 7개국이 참여해 일본군 위안부 책임자 처벌, 배상요구를 진행하게 된다.

한국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사업보고를 받고나서 박두리 할머니께 "해결될 것 같은 분위기죠?" 라고 건네자 "되긴 뭐가 돼!" 하며 괜시리 면박을 주신다.

이번 겨울 일본에서 있을 2000년 법정은 아시아 7개국 여성들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풀어갈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그 오랜 세월, 꿈쩍도 않는 벽에 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수요일을 지키고 계신 할머니들에게 이제는 편히 쉴 수 있는 권리가 주여져야하지 않은가. 김민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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