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사회속에서 평생을 여성 교육에 몸바쳐온 이화의 산증인이자 큰 스승이신 김옥길 명예총장이 25일 유명을 달리했다.

서울 서대 문구 대신동 92. 빈소가 마련된 김 명예총장의 2층 양옥마당에는 친지, 후배 교수, 제자 등 5백여명이 찾아와 눈시울을 적시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찬송가가 조용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상단에 분홍 치마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찍은 사진과 양측의 꽃다발을 제외하고는 빈소는 조촐하고 깨끗했다.

「나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에 따라, 조화를 실은 차 30여대가 문앞에서 다시 되돌아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영정앞에는 양측으로 김 명예총장의 동생인 김동길교수(연세대)및 친지들과 정의숙 전총창, 윤후정 신임총장등 8명이서서 문상객들을 맞았다.

김교수는 시종일곤 빨갛게 눈시울이 젖어있으면서도 찾아온 손님들을 일일이 손잡으며「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모습이었다.

김 명예총장의 제자였던 나영균교수(영문과)는 『생존에 김옥길선생님은 언제나 사랑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분은 단 한번도 내려다 보는 태도를 보인적이 없었지요. 언젠가 한번 고사리수련관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뜨뜻한 방에서 잠을 자다 소리가 나서 방문을 열어보니, 선생님이 제자들이 추울까봐 이불을 들고 내려와 둘러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며, 사랑없이는 봉사할수 없다고 강조하셨는데, 그런 큰 마음을 요즘에는 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신 분이 가셔서 너무나 섭섭합니다』라고 말한다.

제자였다는 김숙자씨(63년 중문과 졸업)는 『선생님은 기억력이 너무 좋으셔서 첫날 출석을 부르고나면 이름을 다 외워 그 다음 시간「누구 책 읽어봐라」호명하시곤 했죠』라며 기억에 남는 모습을 회고한다.

같은 날 5시, 빈소 마당에는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 예배가 있었다.

서광선목사(기독교학과)의 사회로 진행된 이 예배에서는, 평소 김명예총장이 좋아하셨다는 찬송가 453장「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의 찬송과 이근섭교수(영문과)의 성경봉독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빈소에는 김수환추기경을 비롯, 사회저명인사들의 모습이 곳곳에 띄었고, 많은 참석자들이 대문밖의 골목까지 줄을 늘어선 채로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한편, 본교는 김명예총장 장례식을 학교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정의숙 전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김옥길선생 이대학교장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7일 오전 10시, 본교 대강당에서는 고결예배가 진행되었는데, 음악대학 관현악단·합창단 3백여명의 연주속에 엄숙히 거행되었다.

서광선목사의 집례에 따라 진행된 영결Dㅖ배에서는 이규도교수(성악과)의 특별찬송, 음악대학 합창단의 합창등이 이어졌고 정의숙 전 총장의 추도사에 이어 헌화순서로 진행되었다.

한평생을 살며 김명예총장이 간직한 교육신조는 「사랑과 봉사」. 『작년 겨울, 고사리 수련관에 갔을때 선생님을 뵈었었는데…그때 친구와 함께 땅을 보며 두런두런 얘기하며 올라가는데, 일찌감치부터 지켜보시던 선생님께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앞을 직시하고 다니지, 왜 땅을 보고 다니느냐」며 호통치시건 모습이 기억나요』영결예배에 참석했던 배상민양(정외·2)의 말처럼 그의 제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유명하다.

재직당시,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기르는데 있어서도 그는 늘 친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냉면을 안먹어본 사람이 드물다 할 정도로, 「손님맞이」를 즐겨해 냉면이나 빈대떡을 손수 대접하던것도 역시 하나의 일화로 남을 것이다.

언제나 자택을 개방하고 학생들을 직접 초청하는 일이 많았는데, 최근까지도 그는 아픈 몸을 부축받고 나와 학생들을 위해 노래까지 불러주는 애정을 보여주었다.

한편, 이렇듯 늘 다른 사람에게 배푸는 따뜻한 태도의 이면에 여성으로서는 세번째로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여 배짱과 소신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성경귀절과 「주는 나를 기르시는 먹지여/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철을 따라 꼴을 먹여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의 찬송 453장은 그가 늘 간직하며 살았던 신앙. 이러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그는 40여년을 이화와 더불어 여성교육에 몸바쳐 왔다.

옛사람들은 인생을 여로에 비유했다.

여행이 공간을 통한 움직임라면, 인생은 시간을 통한 움직임이라는 사실에서. 결국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삶의 종점에 이르기까지 이루는 여로의 전과정이며, 그가 살아있는 동안 실현한 최대의 가치일 것이다.

짧은 머리, 소박한 한복치마저고리, 은테안경, 우렁찬 목소리의 김옥길 명예총장. 가장 힘든 시대를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결단있게 살아간 그는, 그의 삶을 통해 「영원한 이화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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