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5일(화) 부안군민들의 격렬한 상경시위가 예상된다’는 일간지 보도를 접했을 때 전경과 부안군민들의 치열한 투쟁 현장 속에서 무사히 취재를 마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버스에서 부안군민들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걱정은 곧 일부 언론에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온 몸이 멍투성이인데다가 환자복 차림인 그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폭군’의 난폭함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라 자칭하는 한국에서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전경들에게 맞아 피범벅이 된 부안군민들의 사진은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코 보호대·팔 깁스를 하고 있는 부상자에게 ‘대화와 타협’이 존재하기는 했는가. 어떤 이들은 부안군민이 먼저 전경에게 폭력을 가했다며 이들을 비판하지만 누가 먼저 폭력을 시작했느냐가 결코 문제의 핵은 아니다.

핵폐기장 건설과 같은 중요한 정책 결정을 두고 무조건적인 폭력과 강제만으로 일관 해결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씁쓸함을 느꼈다.

부안에서 촛불시위를 하던 도중 전경들이 던진 물체에 맞아 얼굴을 32바늘 꿰맸다는 홍경림씨의 상처를 바라보니 인간의 끔찍한 잔인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났다.

‘참여정부’를 자처하는 노무현 정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화와 원칙을 중시한다는 정부는 부안군민과의 대화는 커녕 말바꾸기에만 여념없고 ‘원칙’은 전경을 앞세워 부안군민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언론은 부안군민들을 지역 이기주의의 대표적 표본으로 여기고 ‘폭도’로 몰아세우며 국민의 질타를 받도록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이런 ‘왜곡’의 현장에서 나는 ‘약자도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고 외치던 부안군민들의 외침이 귀가하는 길에도 귓가에 자꾸만 맴돌았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언제까지 강자를 강자로 만들고 약자를 약자로 남게만 할 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 곳에서 나는 우리 나라가 마냥 부끄럽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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