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의 전쟁을 겪은 나는 미국의 무차별한 폭격소리마저 음악처럼 들을 수 있는 강한 심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심장은 미국의 폭격을 견디기엔 너무 부드럽습니다.

나를 위한다면 지금 이라크를 떠나주세요.” ‘인간방패’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반전평화팀)에게 좋은 친구가 돼줬던 카심의 마지막 말을 전하는 허혜경씨. 진실함이 배어나는 그의 말에 촛불을 들고 마로니에 공원에 모여있는 30여명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지난 26일(수) 오후7시 마로니에 공원에 어둠이 깔리자 촛불 하나 하나를 정성스레 세워 ‘NO WAR’를 만드는 반전평화 지원연대 사람들. 그들은 지난 21일(금)부터 매일 저녁 이곳 마로니에 공원에서 평화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글자가 완성돼 갈 즈음 촛불을 중심으로 공원에 있던 시민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집회 현장이면 으레 볼 수 있는 깃발과 격렬한 발언도 없이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다.

이라크에서 열흘 전에 귀국한 반전평화팀 허혜경씨는 “광화문 촛불시위는 무조건적인 반미로만 치달아 정서적으로 불편했다”며 “모든 전쟁·군대·군사주의에 반대하고 인류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마로니에 공원에서 새로운 촛불을 들자”고 제안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여성해방연대의 야루씨는 현재 이라크 바그다드에 남아있는 세 명의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원들의 소식을 전했고 요르단 암만에서 난민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반전평화팀 박기범씨가 보내온 메일을 낭독하기도 했다.

“머리가 깨지고 배가 터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나와 이라크에서 인사를 나두던 아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기가 힘들었어. 증오가 될지도 모르는 아픔… 이 전쟁은 얼마나 더 갈까?” 이어서 반전평화팀이 보내온 영상물이 상영됐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해맑게 웃는 이라크 어린이들의 모습과 이라크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평화를 위해 힘쓰는 세계 각국의 반전평화팀들의 활동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고려대 사회과학소모임 ‘left’에서 후배들과 함께 왔다는 박용근(기계공학·4)씨는 “반전평화팀이 보내온 영상 속 이라크의 해맑은 어린이들을 보면서 울컥했어요. 석유 때문에 저 아이들이 죽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라며 더 많은 친구·선후배들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마음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순간에도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에 떨고 있을 이라크 국민들. 힘의 논리 아래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생명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들은 ‘평화의 촛불’을 밝힌다.

밤 늦도록 마로니에 공원은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마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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