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맞댄 채 가지런히 누워있던 시신들과, 그들의 유품인 안경, 고무신, 질그릇. 도끼, 숯돌 등의 생활용품들이 몇 십여년 전의 모습 그대로 자리잡고 있던 다랑쉬굴. 1992년 3월말 여자 3명과 아홉살 난 어린이 한명을 포함한 4.3희생자 시신 11구가 처참하게 몰살당한 현장이 발견된 북제주군 중산간지대 자연동굴인 다랑쉬굴 발굴은 4.3이 현실로 증명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사실 발굴 이전에 주민들 사이에는 다랑쉬굴 학살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실제 그곳에 있던 시신 중 일부는 사전에 유족들에 의해 수숩돼 굴 밖어디엔가 안장돼 있었다.

4.3의 모든 비극적 사건이 그렇듯이, 다랑쉬굴 발굴 또한 주변 사람들에 의해 `쉬쉬;돼오던 것이 `발굴"이란 이름을 달고 우리 앞에 드러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랑쉬굴 발굴 사건이 큰 충격을 중 이유는 말로만 듣던 4.3을 잇는 그대로 보여줘ㅺㅣ 때문이다.

희생자 중 부녀자가 끼어있었고, 발견된 유품들이 무기가 아닌 일상생활 용구였다는 사실은 "제2연대의 성과에 필적하는 훌륭한 토벌업적을 세우려는 욕망때문에"라는 미국 G-2보고서에서도 드러나듯 `전과 올리기"에 급급했던 당시 토벌의 불법성과 비도덕성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당시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 앞서 업적을 세우기 위해 대토벌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다랑쉬굴에 숨어있던 주민들을 발견, 굴 입구에 불을 질러 굴 속의 사람들을 직식몰사케 했음이 현장조사와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다랑쉬굴에 있다가 다른 굴로 피신해 참변을 모면한 채모씨(92년 발굴 당시 67세, 구좌읍 종달리)는 "사건 발생 다음 날까지도 굴 안에는 연기가 가득차 있었으며,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있었고, 코나 귀로 피가 나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다랑쉬굴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은 발굴 이전에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망장소와 일자를 알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혼만 불러 헛묘를 세웠다.

4.3 희생자가 많이 난 도내마을들에는 대부분 이와 같은 헛묘가 있다.

당시 생존자들에 따르면 사망장소를 안다할지라도 `입산자"들의 경우 가족들까지 몰살당하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찾아나서지 못했다가 뒤늦게 묘만 세워 원혼을 달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신이 발굴되자 뒤늦게라도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켜 원혼을 풀어주겠다는 유가족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11구의 시신은 당국에 의해 황급히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현재 다랑쉬굴은 발굴 직후 정부에 의해 막혀버린 상태이다.

당시 다랑쉬굴을 발견한 제주 4.3연구소측은 굴 안에 있던 유물의 보존과 공개를 요구했으나 당국의 반발에 의해 후세에 맡기자며 폐쇄된 것이다.

이처럼 다랑쉬굴의 진실은 가둬지고 말았다.

그리고 희생자들은 군경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줌의 재로 바다에 뿌려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직도 제주도민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침묵과 망각이라는 4.3의 현주소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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