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총선거에서 노동당 승리와 관련, 그 배경과 평가

18년간의 집권공백을 깨고 화려하게 재기한 영국의 노동당의 총선승리는 여러가지로 정치적 의미가 크다.

그것은 유럽에 복지국가적 계급타협 체제가 균열되기 시작한지 20여년만에 새로운 형태의 타협체제가 실험가동에 들어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동안 유럽은 복지국가의 균열 이후 자본가와 중산계급/노동자계급 및 하층계급간의 분열과 충돌을 지속해 왔다.

‘반복지’와 ‘친복지’를 쟁점으로 대립해 온 이 상반된 두 세력이 토리 블레어에 의해 타협지점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노동당의 승리를 해석하는 시각들의 편차는 실로 다양하다.

혹자는 보수당의 장기집권과 부패에 대한 염증에서, 또는 좌파이념을 탈피한 중산층 정당으로의 대변신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급진 좌파들은 노동당의 승리가 유산자들에 대한 아부로 얻어낸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급기야 노동당의 승리가 극우적 대처리즘-80년대 초 영궁에 나타난 극우적 신보수주의의 조류로 ‘자유경제와 강한 국가’라는 모토 하에 공기업의 민영화·노조활동의 억압·복지삭감을 주요정책으로 하는 주의-의 승리라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영국 총선에서 사람들이 가장 의아해 하는 점은 ‘실업율 6%, 경제성장률 3%’라는 좋은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왜 영국인들의 보수당을 외면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당 승리 원인을 보수당의 장기집권과 부패라는 논리에서 구하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가 될지언정 근본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오히려 대처리즘 자체라고 볼 수 있으며 오늘의 보수당 참패는 90년대 대처수상의 중도하차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완전고용과 계급타협을 기반으로 한 복지국가를 배격하고 냉혹한 경쟁의 논리와 소유적 개인주의를 주창한 이같은 대처리즘에 대해 봅 제솝은 ‘두개의 국민전략’이라고 규정하는데, 기존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가 가난한 자·박탈당한 자를 복지정책을 통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통합하려는 것이었다면 대처리즘은 하층계급의 존재를 생산자와 기생자를 대립시키는 수직적 분할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실제 이같은 대처리즘의 결과로 영국은 빈부격차의 심화·중산층의 축소·사회의 분열과 반목 중가와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복지국가의 전통이 뿌리깊고 미국과 달리 소수민족과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멸시감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제한돼있는 영국에서 그러한 전술의 구사가 장벽에 부딪쳤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지방정부의 권한을 축소해 삭감정책을 추진한 결과, 삭감의 비난이 중앙정부에 집중된 것도 하나의 장애요인이었다.

그래서 대처리즘은 복지국가 청산을 요구하는 자본가와 중산계급의 바램에도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 보수층의 신뢰마저도 상실하는 원인이 됐다.

결국 대처는 ‘두개의 국민전략’이 초래한 정치적 부담을 이기지 못해 당내 경쟁분파들의 압력을 받아 중도하차하고 수정주의자인 죤 메이저수상이 등장하나 메이저 역시 대처리즘을 이어받은 것에 불과 해 이미 가동되기 시작한 정치적 불만을 진화하지 못했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이번 영국 총선은 대처리즘의 승리라기 보다오히려 그것의 용도가 완전히 폐기됐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정치본연의 역할, 즉 국민통합에 실패한 데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가져 이제는 보수층마저도 노동당이 내민타협의 손길을 통해 복지국가를 재정비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물론 노동당의 신노선은 대처리즘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등 이전보다 훨씬 우경화 됐다.

그러면 여기서 노동당의 새로운 정치론을 살펴보자. 그들은 현단계에서 기존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표현하는 생산수단의 공유나 복지국가 모델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에 기초한 계급정치의 담론으 과감히 폐기하고 수혜자·공급자·규제자라는 새로운 범주를 정치의 패러다임으로 확립했다.

이범주들은 다계급적 공간이다.

가령 공급자로서의 기업은 더이상 계급대립의 장이 아니라경영자와 중간관리자·노동자가 공생하는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이 공동체들은 시장을 통해 다른 공동체와 자유롭게 경쟁한다.

한편 이들은 공공서비스를 받는 입장에서 보면 수혜자가 되는데, 노동당이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이 바로 수혜자의 권리 강화로 노동당은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제 계급들을 동거시키고 자 한다.

한편 이러한 노동당의 노선수정이 보수세력에 대한 투항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대해 토니 블레어는 보수당과 근본적 차별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자신의 노선을 ‘급진적 중도주의’로 명명하고 ‘개인주의’와 ‘공동체’를 양대 표제로 설정하고 있다.

블레어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지만 보수다의개인주의에 대해서는 ‘시장의 힘에 대한 노예쩍 추종’이고‘공동체’가 없는 조야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는 민영화를 찬성하되 보수당 식과는 좀 다른 ‘지주체 기업(stakeholdership)’을 구상한다.

이같은 블레어의 구상은 해석에 따라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있는 그것이 계급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미지수이고 성공여부도 불투명하다.

그의 변신은 이념적 전환이 아닌, 일본이나 프랑스 사회당과 같은 실용적 우경화에 불과한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게 되면 노동당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집권과정보다 집권 후에 닥쳐오는 위기가 더 문제시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정치가 순항하게 된다면 분열적이고 대결적인 신보수주의의 영국(유럽) 정치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타협의 시대를 진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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