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한지 열흘도 채 안됐는데 도대체 청문회 같은 것을 왜 시작했느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직도 우리 대대수 국민은 부정한 자가 응징받아야 한다는 소박한 바램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만인이 뚫어져라 보는 텐레비젼 화면에서 전세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를 밝혀 정의를 세우겠다고 용약출전한 우리 선량들이 청문회 첫날을 끊은 정태수 초오히장의 모범 (오)답안과 그 답안을 탁월한 암기력으로 마스터한 후속 증인들의 철벽 수비를 제대로 뚫지 못한다.

이런 상태에서 이제 몸통은 커녕 날아온 깃털마저 어디론가 도로 날려줄 판이다.

우선 문제는 온갖 수단으로 국민의 돈을 손에 넣은 자들이 국가 권력을 맡은 정치권을 다루는 기술이 보통 노련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거죽만 드러난 사실만 보더라도 정태수 총회장은 대략 세가지 수단으로 정치권을 상대로 찬란한 공작을 펼쳤다.

우선 그는 ‘침묵’을 통해 정치권뿐만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검찰까지 일단 무력화시켰고 마지막으로 그는 ‘선별적인 발언’을 통해 우선을 푼돈받은 사람들부터 털어가면서 언젠가는 자기를 팽개칠지도 모를 그 누군가를 압박한다.

국가의 첫번째 의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국가를 그 어떤 독재국가와 구별하는 기준이 국가와 사회의 진리능력을 관리하고 나아가 그 진리능력을 발전시키는데 있다는 점을 명확히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돈이나 폭력이 아니고 왜 하필 진리인가? 간단히 말해 국가는 우선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더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다.

궁극적으로 국가는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곳이다.

물론 국민은 무엇이 자기에게 좋은 것인가를 각자 판단할 줄 안다.

그러나 자기 한사람에게 좋은 일이 남에게도 똑같이 좋은 일이 되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 좋은 일 가운데서 더 좋은 일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하지 말아야 할 나쁜일로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나쁜일이라고 해서 스스로 그 나쁜일을 포기할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나쁜 일을 좋다고 고집하는 사람을 말리거나, 아니면 불행하지만 그 나쁜 일을 못하도록 묶어둘 필요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일은 해야하고 또 어떤 일은 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그런 일들을 조목조목 정해줄 마지막 주체는 아직은 국가밖에 없는것이다.

하지만 이런 국가기능이 어떤 독재자 하나에게 맡겨질 수 없다고 했을 때 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전국민적인 참여와 합의가 이루어지는 일종의 대장정이 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현재 진행되는 청문회를 단지 특정 죄인, 아니며 그것이 대통령이든 그 아들이든 어떤 특정 범죄의 배후자를 색출하는 일회적인 수사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그 숱한 희생을 치러 이제 겨우 그 실마리를 얻어낸 우리의 어린 민주주의를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생황양식으로 성숙시켜야 한다는 이 20세기 마지막 과업이 완성되는 진통인 것이다.

돈을 받아먹은 정치인이든 아니면 아직은 돈에 물들지 않은 정치인이든 상당수 정치인들이 7,80년대의 민주대장정에서 개인적인 희생을 치른바 있는 현재의 정치권 구성도를 볼 때 민주주의를 생리적으로 혐오하는 몇몇 정객을 제외하고는 필자의 이런 말을 부인할 이는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이에 필자는 다음의 두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만약 이 청문회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그러나 그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분명히 정해줘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모든 국민이 따를 경제 및 사회도덕의 기준을 세우게끔 하는 그런 과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몇 조를 사취한 죄인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정태수 총회장이라도, 아니면 지금 국민의 집중적인 의혹을 받는 몇몇 인사들이라도, 만약 이런 국가의 근본기틀을 마련하는 데 협조한다면 그는 당연히 사면되어야 한다.

이른바 국기가는 것은 몇조의 비용을 치르더라도 얻어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 현재 벌어진 범죄 당사자들이 서로 뻔한 거짓마로 귀를 짜고 있는 한 그 범죄 현장에 있었을 내부고발자가 나타나지 않는한 진실 그 자체가 단기간에 나타난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이 청문회는 시간을 정해놓지 말고 무한정 계속되어야 한다.

진리능력은 시간의 살팍한 기다림 속에서 허위가 지칠 때까지 버티겠다는 자기 고통의 인내 없이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약한 개인과는 달리 이 사회에서 국가만은 그런 기다림을 조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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