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사업에...”라고 말학서는 적절한 단어를 기억해내기 위해 몇 번이나 성한 왼손을 답답한 듯 내젓는 일을 반복한 끝에 찾아낸 말, ‘망했다’“그래서 장남인 나는 아버지의 빚도 갚고 어린 두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90년 한국으로 들어와 일을 해야 했죠”라고 말하는 에릭 아마라싱카씨는 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노동자. 그런데 에릭씨는 현재 직장이없다.

4개월 전 음성군에 있는 직장을 구했으나 며칠 전 ‘반장’이라는 한국인에게 구타를 당하고 직장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에릭씨는 서툰 한국말을 조합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외국인노동자들은 평소에도 가끔 몇대씩 맞기는 했지만 그냥 참는다”며 “회사 간부들에게 사정을 얘기해 봐도 한국사람들이 원래 좀 그렇다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으니까”라는 그는 한국노동자들이 반장을 가리켜 ‘성질이 드럽다’라고 표현한 말을 기억해냈다.

그 회사에서 그는 전기용접하는 일을 햇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야근까지 하고 나서 기숙사로 돌아가면 눈이 너무 많이 아파서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월급은 75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순박해 보이는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웃음짓는 에릭씨는 그 월급 가운데 70만원을 고향을 보내고 자신의 생활은 야간수당으로 나오는 돈으로 유지해가며 60~70년대 우리의 수많은 여공들이 그랬듯 고된 타지생활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직장 걱정에 빠져드는 그는 지금 직장을 구할 때까지 방앗간에서 일을 도와 일당 1만 5천원을 받아 생계를 해결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급하게 일자리를 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40~50만원 정도의 임금으로 고용하려는 회사들만이 손을 벌릴 분이다.

한국사람들이 5개의 물건을 만들 때 7개의 물건을 만들어낼 만큼 열심히 일해보지만 그런 것을 인정받지는 못한다며 에릭씨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면ㅅ 7개라는 숫자를 가리키려던 그는 “제 둘째 손가락이 없지요”라며 “91년에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썽요”라고 말하며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한 몸짓을 내보인다.

그리고는 “회사에서 치료비를 부담해줬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곳에서 일하기로 결심했었다.

”고 말한다.

회사에서 치료비 외의 보상은 해주지 않더냐는 질문에 “친구가 그런 일을 당하면 도와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알게된 곳이 성당의 수녀님들을 중심으로 외국인노동자들이 의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이 곳 엠마우스”라고 말한 그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몇 차례 그 회사 사장님께 보상해 달라고 말했지만 워낙 바쁘셔서 못해 준 것 같다”고만 말했다.

그리고선 한참 후에야 겨우 “나는 외국인노동자니까”라고 웃어 보일 뿐. 외국인노동자로서 쉽지않은 한국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에릭씨는 “나는 한국말을 꽤하기 때문에 한국말로 길을 물어보는데도 황급히 피해버리거나 욕을 하는 한국 사람들을 대하게 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서글프게 말한다.

그ㅗ가정에서 그와 함께 ‘아프다’라는 단어를 찾기위해 기자가 내놓은 ‘기분 나쁘다’‘속상하다’는 단어에 한사코 고개를 내젓고 덧붙여 그는 “너무 아파 쉬려고 해도 회사에서는 기숙사까지 찾아와 업무가 밀렸다고 우리를 작업장으로 끌고가기 일쑤다”라며 “아플때만이라도 한국사람들이 조금 따뜻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말한다.

돌아가는 기자에게 자신의 옛 얘기를 할 수 있어 행복했다며 소박한 웃음으로 배웅하는 그. 자신이 외국인노동자라는 사실을 마치 속죄양인듯 감내하는 에릭씨의 모습은 이 사회 곳곳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노동자들의 모습의 한단편일 것이다.

에릭씨는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열악한 경제상황을 벗어나기 ㅜ이해 고국을 떠나왔다.

단지 조금더 일찍 선진화를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한 채 부당한 억압을 당당하게 가할 권리가 과연 우에게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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