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전두환 ·노태우씨 사건에 관한 시론을 부탁받았을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지라 원고청탁을 박정하게 거절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짬을 내기가 여간 쉽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 사건에 대해 현재로서는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 더 큰 이유였음을 솔직히 밝힌다.

신문에서 톱기사로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건만 필자는 타이틀만 대충 훑고 넘기기가 일쑤다.

다소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아무도 역사의 현장을 도피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고 하는데, 교수라는 자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민족의 대역사를 두고 너무 무심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류의 문제제기는 정당할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지적 호기심이 충만할 학부시러ㅈ에 이러한 사건을 접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애틋한 관심을 보였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 켠에서는 그 암울한 겨울공화국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 사건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약간의 넋두리가 필요하다.

12·12반란, 5.18을 거치면서 서울의 봄을 짓밟고 5공화국이 출범한 80년 당시에 필자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광주민주화 항쟁의 참상, 연이은 정권의 폭력적 나상들을 소화해 내기에 필자로서는 너무나 벅찼다.

이 부정의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것인가...이러한 시대적 번민들은 유독 필자에게만 강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깨어있기를 원하는 자 모두에게 5공화국은 분명 역사적 원죄다.

어찌 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다면 5공화국 관련자를 정죄하고자 하는 ‘역사바로세우기’는 얼마나 속시원한 일인가? 부정의를 부정함으로써 정의를 세우자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들의 반란혐의를 파헤치고 도둑질한 비자금을 추적하는 작업은 분명 박수를 보낼일이다.

아니 역사적 소임이다.

그런데 현재의 진행상황을 보면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있다.

이것이 전·노씨 사건에 필자가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carr) 가 간파한바대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속에서 발굴한 지혜는 인류 미래에 한줄기 빛을 투사해 줄 것이다.

역사작업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이 확보되고 이것이 인류의 발전을 담보해 줄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사실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느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 ·의식·제도·규범과의 관련성 속에서 그 의미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과거와 현재의 의미관련성을 무시내지 간과한 채 과거를 지나간 사실로 화석화시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아니다.

현재의 전·노씨 사건에서 일종의 비역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연일 신문에서 대서특필하고 심지어 어떤 방송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여 법정출두 가상장면을 서비스해주기까지 한다.

과거의 국헌 문란행위나 반란행위에 대해 비분강개한다.

비자금 조성과 관련하여 시민들의 주머니 사정을 위로하면서 폭로전을 펼친다.

마치 이 사건과 전혀 무고나한 제3자가 연출한 역사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그당시 이들에 기생하고 잇속을 책긴 언론당사자들은 무얼했는지에 관한 속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 집권자의 눈치를 보기는 현재도 매일반이다.

속칭 “땡김”뉴스를 거부하며 공정보도를 보장하라는 목소리가 분출하는 것도 예사롭지가 않다.

이러한 징후는현재와 과거의 대화모습이 아니다.

제도개선과관련하여 노동관련법을 한예로 들어보자. 반란군들이 비합법적으로 만든 악법들이 오히려 기승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제 3자 개입금지조항은 이미 노동부 내에서도 폐지를 검토할 정도로 타당성이 없는 규정인데도, 역사바로세우기 와중에서 민주노총의 임원들을 얽어매는 묘책으로환생하고 있다.

악법의 폐지에 다소간의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악법의 실효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정치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적어도 바로세우겠다는 정책의지와 방향성은 전달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전·노씨만이 아닐 것이다.

학자, 언론, 정치인 등 시류에 영입한 자들에 대해서도 역사적 비난이 가해져야 하고 이들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는 좁아져야 한다.

그러나 동일한 행위를 한 경우에도 줄거기를 잘 한 자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자는 중도탈락하는 예도 보인다.

그것도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한 명분으로 이는 결단코 현재와 과거의 대화법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 잘난 서생적 습성 탓에 필자의 무관심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변설을 늘어놓았는데,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접지는 말자. 어디 한술에 배부르랴. 개혁은 점진적으로 포괄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면 현재의 상황은 반역사에서 역사의 시기로 이행하는 과도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지 않은가. 대장정은 이제 시작됐고 그건 우리들의 몫이다.

언론의 호들갑에 문의할 일은 결코 아니다.

역사의 강물에도 악어가 잇지만 꿈을 꾸는 자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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