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은 파시즘적 폭력 막는 첫걸음 ㅡ역대정부와 광주민중항쟁과의 관계 고찰ㅡ 1984년 5월 17일 오후 2시. 5·18광주민중항쟁 14주기를 맞은 광주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벌어졌다.

독일·일본·필리핀·태국 등 4개국에서 온 국회의원·교수·인권운동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해외에서 본 5·18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주제로 국제심포지움이 열렸다.

이자리에 참석한 독일 브레맨대학의 홀더 하이거 교수는 광주항쟁을 간결하게 한마디로 정의했다.

「부당한 사회적 폭력에 대항해 인간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라고. 바로 이 때문에 세계 여러군데서 광주의 장엄한 항쟁에 연대의 뜻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이야말로 이와 같은 무자비한 파시즘적 폭력이 인류사에서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반드시 내디뎌야 할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광주항쟁의 교훈이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정리되지 않고 방치된다면 또다른 불행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를 표시했다.

만약 현제처럼 광주의 진상규명이 외면된 상태에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독일의 경험과 같이 한국사회에서도 신파시즘의 파괴적인 경향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우리의 오늘 상황에 비춰 비록 짧고 함축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14년 전 80녀녀 5월 광주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과거의 틀에 갇힌 역사」가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숨쉬는 「역동적인 미래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광주항쟁 이래 진상규명을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와 항거는 거셌다.

1980년 12월 9일 광주미문화원 방화를 계기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뒤이어 1982년 3월 8일 김현장·문부식 등의 부산미문화원 방화는 광주문제에 대한 미국의 책임소재를 날카롭게 추궁해 들어갔다.

1984년 유화국면 이후 진상규명 요구는 국민적 공감대의 폭을 한층 넓혀갔다.

1985년 5월 서울 5개대학 73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했고, 이듬해 4월 서울대 김세진·이재호의 분신을 시작으로 이동수·홍기일·이무헌·강상철 등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광주 진상규명을 외쳤고, 이한열·강경대·박승희 등 수많은 젊은 청년과 학생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대열에 산화해갔다.

이들의 처절한 희생을 발판으로 드디어 「6월항쟁」이라는 값진 정치적 승리를 획득했다.

6월항쟁 이후 봇물처럼 터져나온 광주진상규명요구는 한때 국회 광주청문회를 통해 드러날 듯 했다.

그러나 청문회에서도 핵심은 비켜갔고 진실은 더욱 두텁게 은폐되고 말았다.

이런 거센 진상규명 요구 때문에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어느 누구나르 막론하고 「광주문제」로부터 자유오루 수 없었다.

학살의 당사자로 지목됐던 전두환·노태우 정권은 물론, 당시에는 피해자의 한 축을 차지했던 현 김영삼 정권마저도 어떤 형태로든 광주문제에 대해 대책을 세워야 했다.

전두환 정권은 학살의 당사자답게 철저히 「광주」를 유린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소위 3S정책(Screen, Sex, Sports)을 통해 국민을 정치문제로부터 분리시키려 했으며, 망월동 묘역을 폐쇄시키기 위한 묘지강제이전(1983년)을 추진했고, 광주시민을 끝까지「폭도」로 몰았다.

6월항쟁 직후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그보다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노대통령은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표현 대신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불렀다.

집권과 동시에 「민주화합추진위원회(1988년)」를 만들어 광주피해자보상법을 제정케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이런 조치는 돈으로 광주를 무마시키려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심한 국민적 반발을 샀다.

국회 광주청문회(1988년) 역시 마찬가지로 진실을 비켜갔다.

김영삼 정권 역시 취임과 동시에 지난해 5월 「5·13담화」를 통해 「광주해법」을 내놓았다.

주내용은 기념사업과 부분적인 피해보상, 명예회복 등이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쏙 빠져버린 것이다.

김대통령은 진상규명은 「자칫 보복적 한풀이를 불러올 우려」가 있으므로 「역사에 맞기자」고 했다.

김대통령의 5·13담화는 광주시민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노태우 정권의 「돈을 통한 치유」라는 광주해법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후인 1994년 5월 광주는 다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열기로 꽉 채워졌다.

「오월항쟁정신과 광주진상규명을 위한 국민위원회」가 발족돼 학살책임자에 대한 범국민 고발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한 구체적인 연대를 통해 민간차원의 진상규명운동을 확산시키겠다는 움직임도 함께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심포지움에 참석했던 인사들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 각자 광주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정권에게는 부담이겠지만 「군부정권의 상속자」라는 일부의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광주진상규명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될 것이라는 게 각종 여론조사 등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이 5월광주의 현주소다.

이제의 광주일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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