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비확산 경쟁 우리 힘으로 막아내야

한반도가 3·8선에 의해 두동강이 난 이후로 남북한은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분단된 조국안에 살고 있다.

「한국군 비핵지대화 반대」,「2000년 이후에도 미군주둔」등 외세에 의한 냉전의 분위기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외로운 한반도」. 그러나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조의 해결없이 통일은 앞당겨질 수 없다.

이에 본사에서는 군축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을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이 난을 마련한다.

<편집자> 최근 한반도의 군축을 돌러싼 논의와 움직임이 전반적으로 넓게 확산되어가고 있는 반면, 그 흐름에 노골적으로 거스르는 움직임도 격화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군축, 특히 한반도 군축의 의의와 필요성을 살펴보고 이어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정착과 군축진전에 있어 중요한 외적요건이 되는 미 - 소군축교섭의 약사와 실태를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몇차례 계속될 논의전개의 기초가 될 것이다.

군비확산 경쟁과 민중의 피해 제 2차세계대전 이후 계속된 동서의 군비확산경쟁은 여러가지의 매우 심대한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정치, 외교, 군사적인 극한 대결상태로 말미암아 초래된 전세계적인 긴장격화와 끊이지 않는 다양한 규모의 국지전, 그로 인한 막대한 인명, 재산상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제 3세계다수국가의 독재체제발호의 폐해 또한 막심하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 군수산업의 지속적 확충이 가져 오는 전체적인 생산성저하는 결국 다수근로민중의 생활상에 직접적이고도 지속적인 피해를 입혀 왔다.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갈등구조의 양산에서 오는 도덕성의 전반적 퇴락현상은 바야흐로 인류문명의 질적위기조차도 느끼게끔 하는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다.

한반도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군축 이러한 전세계적인 현상은, 동서냉전의 가장 심각한 피해지역인 한반도에서는 그 어느곳보다 두드러진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반세기가까이 동족간의 분단대결구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나타난 갖가지 부정적 현상과 동족상잔의 비극의 피해는 새삼스레 지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방치는 우리민족의 웅비와 대다수 국민의 평화로운 삶의 실현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바로 여기에서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범민족적 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이러한 운동의 성공을 위한 주요한 전제조건들(이것들은 물론 매우 복잡한 상호작용을 한다) 중의 하나로서, 또한 그 과정과 결과로서「군축」이 제기되는 것은 필연이다.

그것은『필요충분한 수준의 군축』이 가져 오는 여러가지의 긍정적 결과들에서 연유된다.

먼저 정치,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 그것들을 살펴본다면 군축이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될 또는 해야될 외국군과 그들, 휘하핵무기의 철수에서 오는 정치군사적 자주권의 획득, 과도한 군사력에 기초했던 반민주적 지배구조의 약화, 민족분단의 강력한 물리적 토대로서의 군사대결체계이완에 따른 통일운동의 실질적 진전 등이 있을 것이다.

군축의 경제적인 효과를 살펴보면 상황은 더욱 확실해진다.

(이 점은 세번째 글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군축은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깊이 깔린 군사문화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고 생산적이고 평화애호적인 심리기풍을 진작시켜 민족문화의 건전한 창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위와 같은 것들이 군축이 가져 오는 긍정적 효과, 다시 말해서 군축의 의의이다.

70년대 미·소군비경쟁으로 치달아 그러면 이렇듯 중요한 한반도의 군축에 가장 커다란 외인으로 작용하는 미소간 군축교섭은 어떠한 모습을 띄어 왔는가. 2차대전의 종결이후, 미국과 소련은 상호적대하는 동서양체계의 선두에 서서 군비경쟁을 최근까지 지속해왔다.

미소가 공히 핵을 보유하게 된 40년대말 이후 그들은 핵확산의 금지를 주요 테마로 하여 최초의 군축교섭을 전개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60년대말까지 그들간의 군축교섭은 상대방의 능력을 어떻게 확증하는가하는 문제등에 걸려 특별한 진전을 보지 못했으나 공중감시 위성체계의 개발등의 이유로 인하여 기술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뒤로는 양자를 둘러싼 정치군사적 여건에 따라 교섭내용의 진전을 보았다.

72년의 SALT(전략무기제한회담)1과 79년의 SALT2의 조인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었다(SALT2는 미의회에서 비준거부). 70년대말의 짤막한「데땅뜨」가 미국의 전반적 보수주의화경향에 따른 극우 레이건 정권의 등장으로 사라진 80년 이후 고르바초프정권등장까지의 5년간, 미소는 한계가 없는 군확정책으로 치달았다.

이 과정은 피차간에 심각한 전체국부의 약화를 가져왔으나 주로 미국의 거대 군산복합체에 의해 주도된 군확경쟁은「별을 의 전쟁」전략, 동시다발보복전략등의 새로운 전략개념을 양산해내며 전세계를 극한 갈등과 대결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80년대, 소련의 평화군축공세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85년 4월의 집권 이후 소위 페레스뜨로이카정책을 내세워 유례없는 평화군축공세를 벌이면서, 87년 12월의 INF(중거리핵전력)폐기협상조인으로부터 시작하여 89년 12월 몰타미소정상회담에서의 냉전종식선언, 그 이후의 CFE(재래식무기)감축협상과 START(전략핵무기감축협상)의 전개,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WTO(바르샤바조약기구)의 대결구조해소및 CSCE(전유럽안전보장체제)의 기능강화로 이어지는 양자의 대결구조와해 과정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숨가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자간의 군축진전과정은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체계의 내부모순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소련의 거의 일방적인 정치군사적양보와 경제적 구걸행위를 동반하며 이루어졌고 따라서 상호모순되는 두가지의 가능성을 함께 갖고 있었다.

즉, 군축의 진전에서 오는 세계평화정착의 가능성과 미국의 일방적 우위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태된 미국냉전선호세력의 자의적 정체집행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후자의 가능성은 아직 평화의 바람이 미약하고 대중적 평화운동의 토대가 취약한데다가 미국의 영향력이 소련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 -미 -일 3각군사 동맹체제의 강화이다.

이는 미국군산복합체의 위력시험장이었던 페르시아만의 전쟁터에서 미국이 압승을 거둔 이후, 최근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종전 이후 미 국무성의 솔로몬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차관보는『한반도의 비핵지대화 반대』발언을, 칼 포드 국제안보담당수석부차관보는 『2천년 이후까지주한미군주둔 필요』등의 발언을 공개석상에서 하면서 그들의 이지역 지배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이 지역에서 갖고 있는 핵전력의 상대적 우위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고 이를 위하여 미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군사동맹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이는 한반도의 군축을 가로 막는 가장 커다란 현실적 힘인 것이며 여기에서 미소군축교섭이 제 3세계, 특히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군축, 우리 민족의 힘으로 이룩해야 그러나 외인은 내인을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거꾸로 말하면, 외적 조건은 내적조건이 거부하면 결코 현실적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민족 내부의 합의에 기초한 효과적 군축방안과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그를 실현하려는 범민족적인 강인한 의지, 그리고 힘이다.

이진철 평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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