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으로 알려진 페레스트로이카에 관한 질문은 다각적인 관점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논리와 그 사상적 핵심은 무엇인가? 오늘의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오늘의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로부터 시작해서 끝내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가장 길고도 고통스러운 여정이다』라고 하는 비판은 과연 올바른 비판적 해석인가?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는 기독교 신앙처럼 영원한 인간의 이상주의와 비유할 수 있다』라고 하는 비판 역시 과연 올바른 해석에 근거한 비판인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제3세계의 입장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고르바초프가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 관심 때문에 계급적인 근본문제들을 망각한다는 것인데, 과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계급투쟁을 전연 무시하고 있는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역시 지배자의 정책이기 때문에 결국 지배자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간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르바초프가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사고」혹은 「새로운 정치적 사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사고」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고르바초프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오늘의 사회는 어디서 와서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정에서 새로 부상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사회주의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현실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올바른 지침인가? 세계사적 대격동속에서 제3세계 민중운동의 진로는 어떻게 새로이 모색되어야 하는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전체 사회주의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특히 북한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사회주의 내에서의 민족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자본주의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왜 페레스트로이카는 혁명적인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통해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대개 이러한 질문들이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관련해서 가장 빈번히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그러면 페레스트로이카에 관한 이러한 모든 질문들의 근본을 파헤칠 수 있는 하나의 열쇠는 없을까?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오직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사고 혹은 변증법적 논리」에 근거해서 소련사회 내부에 만연하고 있는 「소외된 노동」을 분석할 때만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소외된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분석에 의해서 페레스트로이카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을 직접 제시하기 전에 소련 모스크바에서 목격했던 나의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볼까 한다.

1988년 10월, 나는 처음으로 소련 평화협의회의 초청을 받아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 방문목적은 제15차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위한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소련을 방문하면서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소련 노동자들이 「노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노동을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을 「인간의 본질적인 힘」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소련 노동자들은 과연 노동을 통해서 인간의 창조적인 힘, 인간의 협동하는 힘 그리고 인간의 본질인 유적관계를 의식하는 힘을, 다시 말해서 소련 노동자들은 과연 인간의 생산력을 현실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소련 노동자들의 노동상태를 내가 직접 목격하였을 때 나는 1844년에 집필한 마르크스의 『경제학 - 철학수고』에서 묘사된 「소외된 노동」을 연상했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느끼는 노동자들의 소외상태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소외된 노동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정신적 힘을 계발하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적 활력을 무력케하고 또한 자신의 정신력을 황폐화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느끼며 노동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 편안한 느낌을 갖고, 노동을 할 때는 편안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그 노동자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 곧 강제노동이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 이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문제는 소외된 노동 혹은 강제된 노동 속에서 무력케되고 황폐해가는 노동자들의 「노동하는 힘」을 어떻게 회복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외된 노동속에서 무력케되는 노동자들의 「생산하는 힘」을 되찾는 것이 곧 궁극적인 의미에서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목격한 소외된 노동은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사회에서의 소외된 노동」이라는데 그 근본문제가 있는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소외된 노동이 오늘의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존속, 유지된다면 도대체 오늘의 사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르바초프가 안고 있는 근본문제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르바초프가 직면한 소련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근본문제는 궁극적으로 소련 노동자들의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날마다 침체되고 무력케되는 소련 노동자들의 생산력을 다시 의욕적인 힘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곧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의 근본목적인 것이다.

소련 경제·공업생산조직연구소의 사회문제부 소속 학자그룹이 1983년 4월에 개최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소련국가계획위원회·소련과학아카데미의 3자 합동 비밀세미나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의 국민경제발전에는 국민소득의 신장률이 현저하게 계속해서 저하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8차 5개년 계획기간인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연평균 신장률이 7.5%였고, 제9차 5개년 계획기간인 1971년부터 1975년 사이에는 5.8%였던 것이 제10차 5개년 계획기간인 1976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3.8%로 저하되고, 제11차 5개년 계획기간인 1981년부터 1985년의 최초의 2년간에는 약 2.5%로 하락되고 말았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바로 이러한 생산력의 저하 경향을 뚜렷이 나타내 보이고 있는 소련 사회의 현실적인 모순 속에서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소련 사회주의사회가 초기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의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지 못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 근본원인은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는 사고 혹은 그 논리에 결정적인 오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외된 노동의 「지양」을 단순히 「사적 소유의 철폐」로써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소련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원인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의 결과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망각했던 것이다.

변증법적인 사고에 근거해서 소외된 노동을 분석하는 마르크스의 근본목적은 강제된 노동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지탱해오는 노동자들의 생산력을 현실화시키자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사상적 구조를 고르바초프의 언어로써 다시 표현한다면, 페레스트로이카의 근본목적은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에 기초한 생산관계에 의해서 소련 노동자들이 비록 소외된 노동 속에서 무력한 생활은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노동자들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생산력의 개방을 정책적으로 실천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의 생산관계를 「개혁」하고 그리고 노동자들의 생산력을 최대한으로 「개방」하기 위한 정책을 실천하자는 것이 곧 페레스트로이카의 근본목적이다.

이와 같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소외된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사고에 의한 분석과정을 이해할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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