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가 ‘여성’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
여성시가 ‘여성’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
  • 안세아
  • 승인 200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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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파괴적 상상력 넘어 조화로운 생명성에 자리매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 미국여성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강렬한 시구처럼 우리나라 90년대 여성시인들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거친 언어로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이에 일부 평론가들은 여성시를 ‘광기’로 평가하고 파괴에 머물러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성시인들은 거칠고 폭력적인 모습이 아닌 깊이있는 사회인식과 생명, 화합을 담은 모습으로 ‘극점 딛고 다시 나아가기’를 시도하고 있다.

25일(화) 한국여성연구원은 젠더와 문화세미나 ‘딸은 내 어머니의 어머니들’을 열었다.

세미나에 참여한 30여명이 넘는 학생·교수·연구원들은 이은정 강사(국어국문학과)의 발표를 통해 우리나라 현대시에 나타난 모녀를 살펴봤다.

1시간30분 동안 진행한 세미나는 ‘지금의 여성시는 어머니를 모성의 주체로 강요하던 예전과 달리 자신의 정신적·육체적 동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미나에 참석한 김은실(국문·4)씨는 “현대 여성시에 나타난 모녀관계를 통해 페미니즘과 여성시가 서로 영향을 끼치며 변화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성시는 소극적·체념적인 자세에서 거칠고 파괴적인 모습, 그리고 조화롭고 감각적인 모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여성시는 60년대 들어 ‘여성시’라 이름 붙일 시가 거의 전무했던 이전에 비해 질적·양적으로 많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많은 남성시인들이 순수·참여 문학 논쟁을 벌이고 ‘민족·민중문학’으로 고초를 겪을 때 여성은 제외됐다.

남성시인들이 활발하게 동인을 맺으며 문학의 발전을 추구할 때 여성시인들은 여전히 개인적인 문학 활동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남성 전용 등단 관문이던 신춘문예를 뚫어내는 여성시인들이 점차 늘어났고 그들은 다양한 양식과 소재로 문단을 풍요롭게 했다.

문학평론가 최혜민씨는 당시 여성시에 대해 “‘여성적 감성주의’로 규정되던 여성문학은 70년대 초반 강은교 시인을 비롯한 여성문인들의 등장으로 ‘탈 여류문학’으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그 뒤를 이어 최승자·김승희·김혜순 시인 등이 80년대 문단의 중앙으로 진출해 여성문인의 자리를 더욱 넓혔다.

이들은 한·사랑·이별 등의 주제에서 탈피해 사회 비판·철학·비극적 역사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이부일씨는 “남성의 전유물이던 문단에 남녀평등주의가 반영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문인들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해 이뤄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90년대 여성문단을 연 최영미·신현림·김정란·김언희 시인, 그들의 탈근대적인 상상력은 여성의 몸과 성 담론을 중심으로 발휘됐다.

당시 여성시의 특징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이 바로 김언희 시인이다.

그는 시 속에서 ‘섹스’를 ‘씹다 붙여둔 껌’이라 말할 정도로 몸·성에 대한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줬다.

이에 대해 최혜민씨는 “부드럽고 수동적이던 여성시를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게 했고 해체시의 주축을 이끌어 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들의 강한 성적 담론에 대해 일부 평론가들은 ‘사회를 향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는 자기 파괴에 머물 위험을 늘 지니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2000년대로 들어선 지금, 여성시인들은 ‘탈여류문학’을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그 선두로 김선우·나희덕·허수경·김승희·김혜순 시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시를 통해 성적 정체성에 한정되지 않는 ‘여성성’을 발견해 냈다.

90년대 김언희 시인이 섹스 혹은 성기를 통해 여성성을 인식했다면 이들은 자궁을 통해 여성성을 탐색한다.

김선우 시인이 시 속에서 ‘오줌과 똥을 누는 기관’까지 ‘자궁’으로 보는 것처럼 이들은 ‘모체’를 여성 뿐만 아닌 ‘모든 생명체’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을 인식하는 태도 또한 변화했다.

나희덕을 비롯한 많은 여성시인들은 남성을 ‘함께 자아를 찾아가고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공존자’로 인식한다.

이렇듯 우리나라 문학에서 가부장적 억압의 해체도구로 인식되던 여성성·모성성이 이들을 통해 보편적인 자연성·생명성으로 변화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칠 줄 모르는 자기 갱신을 해 온 여성시. 그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적인 것’이라는 벽을 훌쩍 넘어선 여성시인들. 오래돼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시적인 것’또한 허물어 새로운 시 세계를 펼쳐낼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