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천년 전 삶에 대한 열정을 넘치게 타고난 한 여인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은 삶에 대한 열정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바치라 했다.

그러나 세상이 시킨대로 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남자의 가혹한 배신이었다.

그녀의 모든 노력을 기만한 세상과 남자란 존재는 그녀에 비해 너무나 굳건해 복수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메데이아’라 불리우는 그 여인은 남자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찢어 죽여버렸고 그 결과 그녀는 신화 속의 어떤 괴물보다도 끔찍한 존재가 됐다.

누구나 그녀를 떠올리며 진저리 칠 뿐, 자신의 영혼이 담긴 아이를 파괴시킨 후 그녀가 느꼈을 참혹한 슬픔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과 자신에게 돌아온 저항, 몰락해버린 왕조는 언제나 다소간 왜곡된 채 역사의 그림자가 된다.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 주변적인 존재라는 것, 곧 약하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아놀드 웨스커 원작의 연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춘기에 들어선 11살의 딸에게 가수가 직업인 미혼모가 고백하는 내면의 역사와 조언을 다룬 작품이다.

육체적 성징과 함께 여자로서의 험난한 삶을 본격적으로 맞게 될 딸에게 엄마는 빨리 뭔가 조언을 해줘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편지를 쓰는 중간중간 차마 이어나가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다.

‘어머니됨’을 거부했던 그녀의 역사가 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입증하는데 걸림돌이 되기에. 딸을 낳은 엄마가 그토록 자학에 시달리는 것을 보자 문득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곳에서 혼자 울고 있을 메데이아가 떠올랐다.

그녀의 아픈 고백 첫번째는 ‘나는 너를 결코 원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여성을 하나의 인간이 아닌 남성의 성욕을 촉발하는 도구로 취급하는 이 사회에서 그 오랜 시각에 이미 익숙해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 그녀는 어머니됨을 거부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지 못한 임부복을 입고 낮은 굽을 신는다는 건 앞으로 10개월간 성적 매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타이트한 치마에 하이힐을 신었고 아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피임기구를 빼지 않았으며 대마초를 피우고 남성들과 ‘아래로, 위로’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6살이 되자 그녀는 아이를 혼자 두고 일터로 나갔다.

젊은 미혼모로서 먹고 살기 위해, 때론 화려한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 개체로서 쾌락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비워두었던 어머니의 공간은 아직도 그녀를 모질게 괴롭힌다.

툭하면 ‘자격없는 엄마’라며 죄책감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강압적인 모성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신화 속 메데이아로부터 수 천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열정을 갖고 태어난 그녀. 그녀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무너뜨리기보다 스스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길을 택했고 그런 그녀의 가장 절실한 말은 ‘하느님, 제 딸은 저 같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절규에 가까운 바람이다.

딸에 대한 사랑은 차마 표현할 수 없고 딸에게 이해받는 것 조차 체념해버린 그녀는 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뛰어가지마, 뛴다고 잊혀지나 조용히 걸어가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 내 마음도 모르는 사랑스러운 그대∼’지난 날은 아프고 사랑은 표현할 길 없는 그녀에게 딸은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랑스런 그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알까. 이 세상의 딸들은 그녀를, 가부장적 사회의 불합리한 압제에 아파하면서도 그 아픔의 원인을 온전히 자신에게 돌릴 수 밖에 없었던 한 어머니의 절규를 결코 모른 척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임을. 무릎을 꿇고 드레스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장면에서 실제 눈물을 흘렸었던 주인공 최정원씨도 그 순간 어두운 객석 여기저기에서도 크지 않은 울음들이 터져나오고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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