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로댕갤러리에는 아침부터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초등학생 꼬마부터 대학생 커플, 삼삼오오 짝을 지은 주부들까지 한 자리에 모인 까닭은 지난 6월21일(토)부터 이번 달 14일(일)까지 열리는 ‘YES, YOKO ONO’전을 보기 위해서다.

이 전시를 보러 새벽 기차를 타고 대구에서 상경했다는 영남대 기도연(행정·2)씨는 “오노 요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각종 지시문과 퍼포먼스 영상들을 보니 마치 주술사의 집에 온 듯하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올해 고희를 맞은 오노 요코의 지난 40여년간 활동을 회고해 보는 이번 전시는 지난 2000년 기획돼 미국을 순회했고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렸다.

또 미술작품 뿐 아니라 영화·음악·퍼포먼스 기록 필름까지 전시해 비틀즈의 핵심멤버 존 레논의 아내로만 알려진 ‘가장 유명한 무명작가’였던 그녀의 예술 세계를 체계적으로 조명했다.

#플럭서스의 초석을 다진 야무진 잡종과일 요코 오노 요코의 전시를 이해하려면 1960∼70년대 ‘일상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고 일어난 전위 예술 운동 ‘플럭서스’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 사이에서 서구 합리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동양적 대안 문화들이 모색됐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존 케이지의 전위적인 발상이 싹텄다.

당시 뉴욕에 거주하던 일본인 오노 요코의 통합장르적 작품과 이벤트 공연 등은 플럭서스의 형성기에 중요한 초석이 됐다.

오노 요코는 스스로를 ‘자몽’이라 규정하며 오렌지와 레몬의 교배로 탄생한 잡종과일 성향을 지향했다.

그녀의 이러한 의식은 그녀로 하여금 ‘나는 일본 여자, 한국 여자, 뉴욕 여자이자 영국 여자다’라고 말하게 했으며 이는 예술 장르의 접목자 역할을 가능케 했다.

#긍정의 정신으로 관객과 소통하다 그녀는 일상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틀을 넘어서 관객과의 교감을 중요시한 예술가다.

‘지시문 이벤트’의 경우 작품 완성의 반 또는 전부가 관객의 몫이다.

예로, 작품 ‘소망나무’는 ‘소망을 비시오, 종이 위에 그 소망을 적으시오, 종이를 접어서 소망나무 가지에 다시오’식의 지시문과 나무로 구성돼 관객들의 직접적 참여가 이뤄져야 완성된다.

이는 사제와 신도의 관계에 비교되는 작가와 대중간의 관계를 전복시켰다.

이러한 관계의 전복과 관객 참여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그녀의 ‘긍정 정신’에서 비롯됐다.

그녀의 ‘예스 회화’는 관객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돋보기로 깨알같은 글씨 ‘YES’를 찾게 만드는 작품으로 긍정정신이 돋보이는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유부남이던 존 레논을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고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운명적 만남을 주선했다.

#존 레논과의 음악작업 그리고 반전운동 어릴적부터 작곡가의 꿈을 키워온 오노 요코는 존 레논과 사랑에 빠짐과 동시에 본격적인 음악작업을 시작한다.

그녀는 ‘록음악이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심장박동과 같은 안식을 준다’고 말하며 자기 해석에 따른 연주를 강조했다.

창법에 있어서도 괴성·신음소리 등을 이용, 파격적인 자기 표현을 시도했다.

페미니즘 록의 선구자 오노 요코는 남편 존 레논의 음악세계에도 자신의 메시지를 불어넣었다.

존 레논은 ‘Dear yoko’와 같은 요코에 대한 사랑고백 노래와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Happy Xmas’같은 여권과 반전 관련 노래를 불렀다.

이후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음악 뿐 아니라 이벤트와 광고를 통해 반전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마녀에서 예술가로, 오노 요코」 (솔,2003)의 편집자 전수련씨는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오노 요코는 당시의 정신적 충격으로 일생동안 자신의 활동에 평화의 메시지를 담게된 것 같다”고 말한다.

1969년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벌인 ‘베드 인’은 존과 오노 요코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 기자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행사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었다.

그 후 이 못말리는 평화주의자 예술가 부부는 ‘War is over, if you want it’의 대형 포스터를 제작, 영국의 11개 대도시에 부착하며 행동하는 예술혼의 면모를 보여줬다.

#실천하는 페미니스트 부부, 요코와 레논 오노 요코는 ‘여권’에 관련된 많은 활동을 했는데 그중 관객들에게 자신의 옷을 가위로 자르게 한 퍼포먼스 ‘자르기’는 여성을 보는 남성의 시선에 대한 저항으로 페미니즘 역사상 유명한 작품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게 ‘존 레논의 유명세를 등에 업은 기회주의자’라며 ‘너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손가락질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노 요코는 ‘페미니즘이 뭐냐’는 질문에 ‘존 레논’이라고 대답해 남성을 페미니즘의 영역으로 끌어올 때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뤄짐을 밝혔다.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은 여권회복을 몸소 실천한 ‘행동주의자’로, 요코가 출산한 후 유명 팝스타였던 존 레논이 아이를 보고 가사 노동을 하는 ‘house-husband’가 됐고 요코는 자신의 작업을 했다.

이는 1970년 당시의 급진 페미니스트들도 실천하기 어려웠던 일로 진보적인 요코와 그를 잘 ‘내조해 준’ 존 레논의 역할이 돋보이는 일화다.

2차 세계대전의 물살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찾고 평화의 정신으로 사람을 사랑한 예술가 오노 요코. 아시아와 여성에 대한 반감을 온 몸으로 이겨내는 전투정신으로, 때로는 부드럽게 포용하는 ‘Yes’정신으로 독창적 예술 세계를 구축한 그녀의 삶은 평화의 시대, 남녀 평등의 시대로 나아갈수록 주목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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