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고위급회담으로 전국에 통일분위기가 조성된 현재도, 「통일」을 외치며 방북을 감행했던 방북인사들은 수인의 몸이며, 구속중인 양심수의 숫자는 1천 3백여명에 이르고 있다.

『내가 간첩을 낳았다구요? 내 아들은 간첩이 아니예요』라고 단호히 주장하는 무기수 김성만씨(34세)의 어머니 최인화씨(64세) 또한 국가보안법의 아픔을 안고 사는 이이다.

『내 아들이 「통일」을 먼저 원한 것이 간첩죄라면, 그랜저 타고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거드름 피우며 「통일」을 얘기하는 그들도 간첩이예요』라고 최씨는 아직도 양심수를 가두어 둔 채 통일논의를 벌이는 정권의 기만적 태도를 반박한다.

김성만씨는 지난 85년 「구미유 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성만씨는 미국 일리노이대학 유학중 뜻이 맞는 유학생 양동화, 황대권, 이창신씨와 교제를 하며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 「한민보」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한민보」발행인 서정균씨(유신때 동아일보 기자로서 정론직필로 민주화운동에 앞서다 미국으로 건너감)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며 함께 분단현실을 고민했다.

『85년 검거 당시 신문에는 서정균씨가 꼭대기에 있고 우리 성만이, 양동화, 황대권이 그 밑에 씌여 있더군요. 그리고 다시 그 밑에 소위 국내운동권이라 불리우는 학생들이 있어 「간첩단 계보」가 작성되어 있었어요』라고 당시의 황당함을 말하는 최씨. 평소 집안에서 웃음의 근원이었던 김성만씨의 명랑한 성품을 강조하는 최씨는 85년 검거 당시의 일을 잊지 못한다.

『85년 6월 검거후 두달이 지나도록 얼굴도 보지 못하다가 담당형사에게 면회를 계속 요구하여 겨우 만났을 때, 그 명랑하던 성만이가 로보트처럼 굳어 내 얼굴을 봐도 웃지도 않고 묻는 말에 「예, 아니오」만을 대답하더군요』라며 고문의 잔악성에 분노한다.

이 사건과 관련되었던 미국시민권 소유자 이창신씨는 국내 신문의 왜곡보도를 그대로 발췌해 보도한 미국 6개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승소, 사과를 받아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사슬에 걸려 무기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차디찬 감방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김성만씨는 88년 12월 21일 대사면때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면해 현재 대전교도소에 갇혀 있다.

『성만이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우리 성만이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려고 성만이에게 전향을 재촉하지만, 전향은 우리 성만이가 간첩이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므로 저도 전향에 찬성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최씨는 빨리 새 세상이 되어 김성만씨가 당당히 감옥을 나올 때만을 지금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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