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네즈」는 어머니와 딸-정확히는 부모의 권위와 영향력에서 벗어나 이미 성자해버린 딸-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도입부의 의미심장한 현악기음과 절규소리가 예고하듯 「마요네즈」는 모성 혹은 모녀관계에 대해 결코 호의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갖가지 어색함과 언쟁이 이어지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머니와 딸은 분명히 서로를 사랑하고 염려한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모녀관계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모성이라는 것은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기 이전부터 범세계적이고 범인류적인 절대적 아름다움이자 미덕으로 칭송되었다.

모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은 다른 무엇보다 비난을 받았으며, 모성이 가하는 억압을 인식하고 있는 여성들 역시 그에 대한 본질적인 원인 규명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죄책감을 느끼거나 혹은 단념해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잘못된 사회 인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모성->자식"이라는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자식(아들)들만이 여성의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남게 만들었다.

「마요네즈」의 어머니는 더 이상 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어머니"라는 의미 이상을 갖지 못하는 어머니이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끊임없이 딸에게 바친 희생을 언급하며 그에 걸맞는 대우를 요구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딸의 집에 온 어머니가 본 것은 딸이라서 실망했지만 똑똑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기대했던 자식의 모습이 아니라 직장생활에 지치고 혼란스러워하는 임산부였을 뿐이다.

딸의 모습에 실망한 어머니는 위로나 격려를 하는 대신 냉소적인 말로 일관한다.

이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투사한 딸의 좌절이 자신의 실패와 필연적으로 연관된다는 무의식과 안타까움의 발현이 아닐까? 어머니가 딸을 투사체로서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어느 정도 동일시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따라서 서로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 갈등하는 모녀는 각자 상대를 향해 퍼부은 말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 자신도 그만큼 상처를 입게 된다.

절대선이었던 모성, 그 허구가 집요하게 드러나면서 아버지의 위상에 대한 언급이 이 작품의 제목인 「미요네즈」와 맞물려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마요네즈"는 어머니 혹은 아내로서의 자아가 아닌 본연의 자아에 충실하려던 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비난의 매개체이다.

외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여기에서는 딸의 시각) 병든 가부장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할 도리를 져버린 어머니는 혐오의 대상이며, 그처럼 고귀한 "모성"을 상실해버린 어머니는 더이상 존엄과 신성함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가부장의 부재를 전제한 이 작품에서 여전히 가장의 망령은 두 여성을 지배하고 있고 때묵은 채 접어두는 한이 된다는 것, 그리고 영웅적이지 못했던 가장의 최후의 탓을 서로에게 돌리는 모녀에게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종속적으로 남아있는 여성들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아들없음에 돌리는 어머니를 공격하는 딸.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세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희생의 여성상에 대해 우리들은 여전히 권력의 구심점을 무대에서 찾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곳, 이미 사라져버린 남성들에게서 희미하게 감지할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빽"으로서 남성들이 존재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

모성, 언제나 그 미묘함을 다루기에 우리는 주저했었다.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여성들에 대한 미덕은 모성하나로 축약되었고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문제를 제기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모성의 문제는 어머니에게서 딸로 대물림되며 결국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우리들, 딸들의 문제로 남기 때문이다.

「마요네즈」는 모성이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벌어지는 어머니와 딸의 문제를 적절히 묘사함으로서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모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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