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기도>라는 노래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다.

"겁에 질린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라 해도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는 입술을 주시고···" 지금 이 순간처럼 그 의미가 간절하게 느껴지던 적은 과연 몇번 이었을까.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움이 다가와도 나는 정말 끝까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불이 꺼지고 화목하기만 해 보이는 어느 가정의 저녁 식탁을 배경으로 이 연극은 시작된다.

스토크만 박사는 민중 신문 주필인 홉스타드와 기자 빌링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던 중 마을의 생명수라 할 수 있는 온천의 물이 오염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를 통보받게 된다.

스토크만 박사는 이를 사회에 알려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른바 "민중의 언론"이라는 민중신문사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로 한다.

그의 의도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온천의 물이 오염되어 있다는것, 그래서 그 사실을 알리고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복구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세상은 그런 그를 받아들여 주시 않는다.

스토크만 박사의 형인 스토크만 시장은 그가 사회 전복을 위해 그런 이야기를 퍼트린다며 그를 매도한다.

아니 그의 형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으나 공사 금액이나 주민의 동요등을 이유로-그 내면에는 자신의 지위 유지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있다-사실을 외면한다.

그의 편일것만 같던 신문사 사람들도 어느새 시장의 편이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신문사의 생존이, 그들의 미래가 더욱 중요한 까닭이었다.

스토크만 박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강연회를 열었을 때도 형을 비롯한 신문사 사람들과 혹시 자신의 이익에 해가 될까 두려워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의 진실은 은폐당하고만다.

그가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그는 일상의 삶을 깨는 반역자일 뿐이었다.

그들의 생존에 관련된 진실을 이야기한 스토크만 박사는 영웅이 아니라 민중의 적이 되버린 것이다.

결국 스토크만 박사는 자신과 가족에게 행해지는 다수의 횡포를 경험하며 그곳을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깨닫는다.

외로움을 견디며 스스로 진실을 보여 주기로, 스스로 민중의 적이 되어 싸우리라 마음 먹으며 연극은 끝이 난다.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신문지상에 떠도는 이야기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는 사람들, 진실을 알아도 말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는 사람들, 갑자기 갑갑해졌다.

1백여년 전에 씌어진 입센의 희곡이 왜 아직도 현실 사회를 반영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백여년 전 입센이 보았던 현실과 지금 내가 보는 현실은 왜 다르지 않은지 도무지 알 없었다.

연극의 결말 역시 나에게 어떠한 해답도 제시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 것은 관객의 몫인가? 아니면 입센 그 자신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 변하리라, 시간이 흐르면 진실이 밝혀지리라 우린 이야기 하고 그저 관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 공연이 연극적으로 아주 훌륭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난무하는 풍자극 사이에서 철저한 리얼리즘 연극은 오히려 지루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농담거리인 양 현실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보여주는 풍자극을 벗어나 다소 무겁더라도 관객에게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번쯤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지금 많이 어렵다고들 한다.

경제도, 사회도, 정치도 어슬렁 거리기만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하는 것인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것은 진실을 진실이라 말하지 못하고, 또 진실을 진실이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실은 거짓이라 말해버린 까닭이 아닐런지. 내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 할수 있는 입술과 진실을 진실이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해달라고 나는 지금 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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