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이타닉」을 둘러싼 논란

얼마전 컴퓨터 통신을 중심으로 시작된 「타이타닉」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뜨겁다.

연예계의 가십이란 것이 등장할 때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것에 비해 소위 ‘타이타닉 불매운동’은 기이할 정도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천리안에 개설된 토론란에 로려진 의견들이 한달도 못돼 2천개를 넘어설 정도다.

이 논쟁안에 무엇이 끈질기게 버티고 잇는 것일까. 처음에 그것은 작은 불씨로 시작되었다.

「타이타닉」의 주인공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일본에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 디카프리오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 통신에 개시되기 시작하면서 방향은 개봉을 앞둔 영화 「타이타닉」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흘렀다.

배우의 잘못된 행동와 이에 대한 반응의 형태를 가지던 논의는 여기서 새롭게 나간다.

4대 통신망에서 토론란이 개설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현재의 한국이 처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통신에 올려진 글과 언론의 보도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즉 이 논의는 뚜렷한 의견을 가진 양측의 싸움이 아니라 다양한 논의를 끌어들이며 불어나는 확산형이라는 점이다.

타이타닉을 볼 것인지 아닌지를 주장하면서 내세우는 근거는 현재 한국사회가 가진 문제점들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그 표현이 미숙하든 논리적이든간에 적어도 그 글들은 글쓴이의 입장과 감정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토론란에 올려진 많은 글들의 뒷면에 있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다.

IMF라는 경제난국의 해결방안, 직배영화의 외화유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문화생활로서의 영화관람에 대한 의미, 「타이타닉」의 예술성에 대한 논의, 애국자와 매국노의 개념정의와 적용, 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비관적 냉소주의, 기타등등… 말하자면 ‘타이타닉 불매운동’이라는 토론란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영화 「타이타닉」이 아니라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과 그에 대한 반응들인 것이다.

이것은 현재 올려지고 있는 글들이 논쟁의 도화선이었던 디카프리오의 망언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사실무근을 주장하는 배급사의입장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디카프리오라는 배우가 한국을 비난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몇변에 걸쳐 토론란에 오랐음에도 논쟁은 진행중이다.

영화 「타이타닉」을 50만이 보면 그도안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달러가 전부 날아간다는 근거없이 잘못된 산술, 수많은 직배영화중에 오직 「타이타닉」만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상한 적용, 이러한 얘기가 반복되면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 주장이 참이라서가 아니라 일종의 상징 혹은 은유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려운 경제상황과 소비방식, 이에 대한 심리적 공황과 분노, 그리고 이런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통신의 익명성이다.

아쉽게도 이 논쟁의 신뢰할 만한 결과는 아직 나오지 못했다.

그 대신에 토론란을 오가는 것은 상대의 의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나 감정적인 반은 또는 무차별적인 욕설들이다.

이성적인 표현과 감정적인 수사가 뒤섞인 논쟁이 늘 그러하듯이 논쟁에서 승자는 있지만 패자는 없다.

동새에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이도 찾기 힘들다.

남는 것은 입장의 황인과 반복뿐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배설행위인가? 그러나 이러한 고착상태의 가장 큰 원인은 익명성을 보장하는 통신문화의 한계에서 찾는 것은 조금 성급한 듯하다.

논쟁에서 떨어져나와 전체의 모양새를 살펴보자. 먼저, 영화라는 매체는 상거래를 통해 판매되지만 설탕이나 밀가루가 아닌 문화상품이다.

이것의 가치는 구매자에 따라 달라지고 때로는 기대이상의 효과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예술로서 다가와 삶의 깊이를 더한다.

‘영화=6천원’이라는 공식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금모으기 운동이라는 것은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상징적인 행위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금’이 아니라 ‘금기’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나라가 위태하니 집안에 금을 두면 안된다, 직배영화는 달러가 나가니 보면 안된다.

이 다음에는 뭐가 올것인가? 한국경제가 어떻게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고, 누구의 잘못인지를 밝히지도 못한 채 다만 현재의 어려움만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현실 속에서 주춤거린다.

성실한 아버지, 착한 오빠가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것을 목격한다면, 영화 한편 안보고 외화를 아끼는 것쯤은 비교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통신상의 논쟁이 쉽게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현실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타이탁닉」을 둘러싼 논쟁은 불안한 경제상황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 돌출된 것이다.

이 논쟁이 결론을 얻고 끝맺을 것 같지는 않다.

논쟁의 해결책이 영화의 바깥에 있으므로. 하지만 ‘타이타닉 불매운동’을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의미있는 논쟁으로 만들 수는 있다.

그것은 현실세계를 개선하기 위한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외화에 대한 관심을 안으로 돌려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제도 등으로 말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