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의 인간심리와 문화

IMF 체제 하에 들어가면서 생활고의 비명들이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수입이 줄어들다 못해 정리해고와 실업의 공포에 이제 수입 자체가 완전히 끊어질 형편이니 힘들다는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짐에 따라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최근의 구호들은 바람직하다 못해 당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혹자는 아끼자는 논리를 넘어 현재의 경제위기가 오히려 다시 기반을 다시고 단결된 모습을 세계 만방에 떨쳐 보일 수 있는 기회라고도 한다.

생활이 힘들고 위기감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는 때인 만큼 여러 매체들에서도 변화의 경향이 제법 뚜럿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방송이 아닌 여타의 매체에서는 불황이 조금씩 심해지던 97년부터 새로운 유행 경향이 심심찮게 드러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영화의 경우 이미 가을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최루성 멜로물이 강세를 보여왔고 문학의 경우도 불황 속에 사기가 저하된 가장의 고민과 가족의 문제를 보여준 소설 「아버지」가 아마추어 무명작가를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문학 부문 베스트셀러의 목록은 97년 초부터 돈버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창업서들과 보다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처세서들로 메워지고 있다.

위기는 인간을 나약하게 하고 나약해진 인간은 강력한 외재적 힘을 그리워하게 된다.

생활고로 각박해진 인심탓에 나타난 ‘아버지 기살리기’등 일련의 가족애 회복 운동(?)이나 혼란스러운 사회를 바라보며 ‘아! 옛날이여’라는 부질없는 회상 속에서 예전의 강력한 독재 정권의 개발 드라이브조차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의 강도는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희망없는 세상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충동적인 범죄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경우도 간혹 우리 귀에 들려온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그래도 옛날을 회상할 수 있는 상황이나 혹은 그것을 통해 심리적인 압박감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현재 과거에 대한 회상과 그것에 대한 향유 기회 제공을 주도하는 매체는 역시 TV다.

이는 TV만큼 시류와 여론에 많은 영향을 받는 매체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새해 들어 IMF 체제 이후 새로 편성된 방송사들의 프로그램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미 방영됐던 드라마의 재탕이다.

제작비 절약의 차원에서 혹은 그들 말그대로 ‘걸작’을 보지 못했던 시청자들에게 다시 그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방영되는 이런 드라마드르이 대부분은 역시나 못살던 그 때 그시절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둘러싼 각종 매체들도 모두 근검 절약과 자립 경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바뀌어 가고 있다.

또한 이 어려운 시대에 가무가 왠 말이냐며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쇼프로그램의 거품 빼기에 들어갔고 덕분에 댄스가수들의 현란한 몸동작과 신나는 노래는 하루 아침에 천덕꾸러기로 강등됐다.

뿐만 아니라 방송사들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새로 제작되는 드라마까지 ‘복고’라는 미명 하에 6,70년대를 배경으로 힘들지만 정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경쟁이라도 하듯 보여준다.

때가 때이니 만큼 이제 우리는 문화생활에 대한 별도의 지출없이 스위치 하나로 현재의 우리 모습을 비춰보는 과거의 그 때 그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TV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기성 세대는 자신의 젊었던 시절을,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의 힘들었던 모습을 보며 새로운 삶에의 의지를 부태우라는 뜻인 듯한데,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눈물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지기 위안으로 귀결되는 단순한 스트레스의 해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것은 다양한 기능을 지니며 그 중 하나는 지루한 일상에 지친 우리의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라고 해서 정신적 피로의 해소가 반드시 눈물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공기와 이슬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처럼 눈물만이 의미가 있고 흥겨운 음악이 하루 아침에 사랴져야 할 악덕으로 바뀔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문화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꿈꿀 자유도, 상상할 자유도 제한된다는 뜻이지 않을까. 설탕은 음식을 달게 하지만 소금을 조금 넣으면 그 단맛이 더욱 강화되기도 한다.

적어도 문화에 있어서 만큼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화된 문화는 퇴보일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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