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란 가치중립적인 아름다움에 관계된, 현실과 무관한 하나의 예술장르인가. 현대 미술사 연구회가 주최한 제1회 현대미술사연구회 학술심포지움, ‘현대미술사와 페미니즘’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대답한다.

지난 4일(토) 법대 강당에서 열린 이 심포지움은 결론적으로 말해 ‘미술사란 성 정책과 권력 관계의 현재 구도에 기여하고 성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일련의 실천으로 이해돼야만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미술사는 여성에게 그저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남성주의적 담론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성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페미니즈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를 얻을 수 없는 여자들: 왜냐하면 너무 못생겼기 때문에 . 남자를 원하지 않는 여자들: 왜냐하면 레즈비언이고 따라서 자연에 위배되므로, 남자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들: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또는 남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갖기를 원하기 때문에, 혹은 그두가지 다이므로. 남자들은 증오하고, 그래서 매력없이 됨으로써 남자들을 ‘응징’하고자 하는 여자들’다시 말해 나븐 여자들이 떠들어 대는서구에서 유행하는 못된사조인가? 이 심포지움은 우선 우리가 ‘페미니스트’란 용어에 대한 숱한 오해와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페미니스트란 용어에 대한 위의 블랙메일은 마치 페미니즘이 실제 ‘남성’에 대한 적대감에 똘똘뭉친 운동이라는 식의 오해를 하고있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여성을 포함한) 인류의 일부를 억압하는 문화적 규범의 논리를 비판하고 억압없는 사회라는 목표를 위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실천하는 ‘남녀 모두’에 해당하는 것도 분명히 한다.

지금 페미니즘의 문제는 여성의 신체와 여성의 경험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에 근거하고 있는 서구 근대 사상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미술로 들어갔을 때, 여성에 관한 이미지는 서양미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세기 중반 근대미술이후 20세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여성 이미지는 소재적, 주제적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서양 누드화의 경우를 보았을 때 서양회화사에서 화가, 그리고 감상자, 즉 그림의 생산자와소유자는 성별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남성으로 가정되었으며 거기서 오브제로서 다루어지고 거래되는 것은 여성이었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남성은 여성을 본다.

여성은 보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

이것은 남녀 간의 관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에 대한 관계도 결정해버릴 것이다.

그녀의 내부 관찰자는 남성이었다.

그리고피관찰자는여성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전이시킨다.

그것도 시각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이다.

결국거기서 그녀는 광경이 되는것이다” 이러한 불평등한관계는 아직도우리의 문화속에 뿌리깊에 남아잇기 때문에 심지어는 남성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의 의식까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리고 여성을 보는 이러한 시각, 여성이미지의 본질적인 사용법은 변치 않고 오늘날의 광고, 저널리즘, TV, 등에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날 심포지움에서는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미술은 개인적인 재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여러가지 ‘사회적 세력들’, 예를 들어 교육제도라든가 후원체계 등에 의해 매개되고 결정되어 온 것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나아가 ‘여성 평론의 문제’,‘페미니즘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백 인종의 문제’, ‘역사를 결정하는 매개 체계, 즉 권력과 남근’, 그리고 ‘의미에 대한 특권화된 조작자로서의 개념을 반복하고 복제한 미니멀리즘의 문제’가 이날 심포지움에서 다뤄졌다.

그렇다면 미술이란 영역에서 ‘여성의’시선을, 여성적 주체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예술작품의 감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작품에 대한 형식분석을 할수도 있고, 내용에 대한 문학적인 설명을 할 수도 있으며, 미술사적 맥락에서의 작품의 위상에 대해 논 할 수도 있다.

맑시즘적 입장에서, 혹은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이 심포지움에서 정헌이씨는 이 남은 부분을 ‘정서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흔히 정서란 이성과 대립된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기에-이성은 합리적인 것, 정신적인 것, 보편적인 것, 공적인 것, 그리고 남서적인 것과 연관되고 정서는 비합리적인 것, 물리적인 것, 특수한 것, 사적인 것, 그리고 여성적인 것과 연결되어 왔다.

-정서의 영역에 대한 담론은 거의 부재하고 따라서 우리는 정서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는 어휘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정서란 믿을만한 지식으로 간주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날 심포지움은 지금의 단계에서 말해질 수있는 것은 만일 페미니스트적 방법론이 있다면 그것은 “자체로서 완결된 어떤 방법론이 아니다”라는 점임을 분명히 했다.

다만 소위 말하는 여성의 문제는 결코 주변적인 하부-문제가 아니며 여성의 문제야 말로(미술사의) 가장 ‘자연스러워보이는’ 근본적인 전제들을 재점검하고, 다른 종류의 내적 질문들을 위한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다른 분야에서의 개혁적인 접근법들에 의해 설정된 패러다임들과의 연계를 구축하는 잠재적인 지적 도구, 촉매제라는 것을 확인했다.

과학, 이성, 합리라는 이름이 가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남성적인 것임을 확인하고 대안적인 시선과 언술체계를 마련해 나가는 것이 지금 페미니즘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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