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신드롬

90년대 이후 세상을 들여다보는 가장 강력한 단어는 신드롬(syndrom)이 아닐까? 영어 스펠링‘syn ’이 ‘같이’혹은 ‘더불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신드롬은 한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이나 동일시의 경향 등, 심리적 이상증세가 사회 구성원들의 지배적 경향이 되었을 때를 일컫는 말이 된다.

90년대 들어 최진실신드롬이니 차인표신드롬이니 해서 특정 연예인에 대한 광적인 대중적 집착을 인컫던 이 용어는 전생 신드롬, 애인 신드롬, 이승희신드롬을 거쳐 드디어 박찬호 신드롬에 이르러 ‘초신드롬’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상’으로서의 신드롬이 오히려 일상의 내재된 한 모습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말이다.

박찬호의 기사가 국내 스포츠 소식을 제치고 언론의 주요 면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해졌으며 다저스를 ‘우리 팀’으로 인식하는 것도 감정의 흐름상 당연해졌다.

이젠 심지어 박찬호가 이긴 날은 일도 잘되고 기분도 좋고 만사형통이지만 진 날은 될 일도 안된다는 말이 언론의 가십란을 통해 공공연히 흘러 나오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신드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소재찾기에 급급한 상업 방송매체가 아니라 위안물 없는 우리자신의 일상임을 드러내고 있다.

신드롭은 특정한 사회적 상황하의 대중적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혹은 징후를 드러내는 문화적 계기들의 맞물림에 의해 생겨나고 이후 자신의 독자적인 담론의 질서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완성한다.

현재의 불안정,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준거를 찾지 못하는 대중들의 내적 불안 상태에 맞물리며 등장하는 신드롬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지시하는 바로미터의 기능을 한다.

대중들이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는 혼란한 사회가 신드롭을 양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불안 해소와는 무관할 뿐더러 끝없는 대채물로의 이동으로만 우리를 이끈다는 점에서 신드롬 은 일종의 마약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발찬호 신드롬의 무서운 힘을 보면서 현실적 문제에 대한 공상적 대리 만족, 그리고 한방의 통쾌한 승리감의 만끽으로 우리의 일상적 불안을 잠재운다는 점에서 신드롬의 역기능이 무엇인지 윌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찬호 신드롬에서 각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활동과 성공이 철저한 자본주의적 질서에 기반한 그야말로 프로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최근의 민족적 열광은 한마디로 딱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늘 진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불감증과 타성에 익숙한 우리들을 더욱 단단한 ‘현실적 행동의 불가능’성으로 가둔다는 것에서 신드롬의 문제는 심각하다.

늘 진지한 것은 덕목이 못되지만 도믄 문제에 진지한 성착을 ‘무거움’이란 이름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익숙한 문제 해결(?)방식, 비이성과 불합리는, 시대적 불행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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