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노동의 고단함과 일상의 지루함 속에서 잠시 그것과의 단절로서 ‘축제’를 벌였다.

축제의 휴식과 놀이는 삶을 지속하기 위한 힘의 재충전이자 삶을 새로이 변화시키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렇게 단전로써 새로운 지속을 가져오기 위한 ‘축제’의 공간은 일상의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 허락돼 왔고 공식적인 체제를 무효로 할 수 있는 힘의 공간이 돼왔다.

그 날만은 기층민들이 양반계급의 횡포와형식적인 도덕에 대해 마음껏 욕하고 조롱하며 춤출 수 있었고, 여성들이 모여 억압의 한을 굿의 제의로 풀며 울고 웃을 수 있었으며, 종교적 권위에 대해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축제는 바로 ‘해방의 시공’을 의미할 수 있다.

고정된 일상과 지배적 체제의 틀을 깨는 해방의 힘은 다시 축제로 부터 일상으로 환원한다.

이와 같은 순환이 계속되면서 축제는 삶을 끊임없이 혁신시킬 수있는 가능성을 갖게 한다.

이제 몇몇 큰 명절 외엔 축제라 할 만한 것이 없어진 우리사회에서-그러나 명절도 점점 형식적이돼가고 여성들에게는 ‘공포의 날’인 것을 생각하면 결코 즐겁지 않은 축제다-5월이 되면 유독 대학들만이 축제로 무성해진다.

대학 캐머스에는 주점과 장터, 오락코너들로 즐비하고 마치 유원지에 나온것인양 커플들이 북적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느길 수 이는 활기라곤 단지 소비문화의 활기뿐이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하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여느 상권의 모습과 같은 캠퍼스 안의 사람들을 보면 ‘축제’의 에너지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에너지의 소진과 서로간의 소외만 있을 뿐이다.

5,60년대적 쌍쌍파티의 로맨스가 대학의 젊음을 대변하고 현대의 소비자본주의화로 대학문화를 표출한다면 대학축제의 유의미성과 잠재력은 이야기 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축제’는 마당놀이와 탈춤의 전통적 형식을 빌어 현실을 풍자하고 폭로하는 해방의 출구를 찾기 시작했던 70년대와 사회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는 ‘의식공동체’로서 고유의 대동놀이를 살려 ‘대동제’로‘축제’를 대신하며 해방의 판을 마련하고자 했던 80년대를 거쳐왔다.

대학이 ‘놀이’라는 것을 계속하려면 축제의 본래 의미에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80년대의 정치, 사회적 긴장감 이후에 오는 무목적적인 이완으로 개별화되고 소비성 짙은 축제, 그리고 거기서 끝나 버리는 일회적 행사로 흐르기 보다는 축제의 잠재성과 가능성에 다시금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축제라는 공통의 장을 마련해 금기와 기성체제에 대해 무효화를 선언하고 권위에 도전하며 해방의 에너지를 맛봤던, 그래서 그것을 삶의 혁신으로 연결시켰던 목적성 있는 이완의 의미를 배우자. 대동제는 대부분 개별화되는 학생들을 해방공간이라는 커다란 테두리고 엮어낼 수 있고-그러나 그러한 ‘대동’이 무의미한 집단적 힘의 과시나 기성권력의 지배적 속성을 닮은 것이 돼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기성의 부정의에 대항하는 진정한 ‘대동’의의미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그들의 다양한 에너지들을 모아 지배적 질서와 권위에 대한 저항할 수 잇는 새로운 힘을 생산해냄으로서 젊음을 대변하고 대학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생산적 문제가 될 수 있을 거싱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삶의 혁신으로 이을 수있는 대동제의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이때 비로소 축제가 진닌 ‘일상의 새로운 지속을 위한 단절’이라는 의미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난장을 튼다’는 말이 있다.

안정된 일상을 단절하고 새로운 일상을 지속하기 위한 에너지의 원상을 위해 대동제에 난장을 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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