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이승희 붐을 통해 본 성문화

이승희를 보면 어쩔수 없이 자꾸만 ‘젖소 부인’의 그여배우 생각이 난다.

그여자의 이름은 진도희다.

진도희는 에로영화배우다.

진도희에게는 영화 안과 영화 밖이 구분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녀는 TV나 잡지에서 자신의 지능을 테스트 당하고 영화속의 캐릭터와 구분되지 않는 , 젖소부인으로서의 인터뷰를 강요당한다.

뜸해 지긴 했지만 지면을 통해 간간히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한껏 섹시해 보이려는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눈동자는 초조하고 불안하며 조바심 나 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그 어ㄸJㄴ 시선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런 그녀의 표정은 당연하다.

자신을 긍정하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행복한 표정을 그녀가 가질 수 있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반면 이승희의 표정은 다르다.

그녀는 스스로 자랑스럽고 당당하기 이를 데 없으며 ‘벗는다’는 것도 여자가 자아를 실현하는 한 방법을 수 있음을 당당하게 얘기한다.

그녀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킬 강력한 ‘권력을 가진 벗은 여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한 남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 남자들을 상대로 여자가 벗는다는 것은 ‘몸뚱아리’하나 밖엔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소수, 권력과는 무관한 계층의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었으며 그런 여자들은 창녀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창녀는 스스로 권력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몸을 소유한 남자들의 지위와 권력을 통해 의사 권력을 가질뿐이다.

이승희가 우리를 의아스럽게 하는 것은 벗은 여자들에 대해 우리가 가져온 창녀의 이미지를 벗어나 스스로 권력적이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녀에게 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희로 집중된 ‘벗은 여자’에 대한 가치의 전도는 이승희라는 인물을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다.

주유소나 호프집의 달력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있는 수영복 모델들이나 진도희는 여전히 음울하고 음란하며 천하고 야하다.

그들과 이승희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외설적이지만 이승희는 자아를 실현한 프로패셔널한 아름다운 직업 여성이다.

진도희는 진도희고 이승희는 이승희다?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승희는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부각시켜주는것은 예술이지만 남성의 성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것은 외설이라고 자신의 주관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주관적인 생각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과 남성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의 차이와 구분점은 현실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가? 여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건 남성들의 말초적 성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건 여자의 노출은 남성을 타자로 상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사회으 지배적인 시각으로서의 남성의 미의식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위에 성립된 미적가치임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순수한 자연스러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사회적 작용의 결과임을 냉철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신체는 그것이 남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일 때 자랑이며 따라서 예술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에도 불구하고 항상 수치의 근원이다.

예술과 외설은 순수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난데없이 몰아닥친 이승희 신드롬은 외설을 인정하지 않는, 누드모델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며 벗는 배우는 연기파 배우가 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감추어야 하는 우리의 위선의 문화 때문이다.

한편으론 진도희를 보던 그대로의 눈으로 이승희의 몸매를 은밀히 감상하며 한편으로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대하는 이 위선. 우선 이승희는 의대를 중퇴한 능력있는 여자였으며 자기 변호를 할 줄 아는 멍청한 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벗는다는 말의 칙착한 분위기를 상쇄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승희가 우리를 열광시킨 것은 박찬호라는 코리안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승리주수가 된 것에 감격하던 그대로, 바로 그 선진국에서 우리가 스크린에서나 흠모하던 데미무어를 누르고 섹시한 여성 2위로 올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미디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내면에 깔려있는 열등감, 콤플렉스의 대리해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고발이면 고발이지 코미디는 아니다 외설을 둘러싼, 스펙타클로서의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이 양자가 조절되어 만들어 낼 법한 인간의 욕망, 그 가운데 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둘러싼 진지한 논의가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우리 문화의 일방적인 폭력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을 뿐이다.

반복되지만 이승회가 이런 난리법석의 주인공이 된 것은 미국인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잘빠진 여자가 사실은 ‘우리 것’이라는 가부장적 민족 이데올로기에 기한 열등감의 표출로서의 자긍심(?)에 불과한 것임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한번 생각해 보라. 정말 우리나라의 수많은 누드모델과 이승희가 다른가?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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