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일러스트 조각전’

‘일러스트 조각전’은 쉽고 친근한 조각을 표방한 기획전이다.

이러한 전시회 기획의 의도에 맞춰 일곱명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선정됐고 그 테마는 바로 ‘인간’이다.

작품속에 담긴 인간의 모습은 그리스의 신상처럼 이상적인 형태도 아니며 철학적 사유에 잠긴 모습도 아니다.

단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익명의 사람들, 또는 삶의 흔적이 마치 민화처럼 해학적으로 묘새돼 있다.

투박한 나무조각에 화려한 채색을 함으로써 그 무표정함이 더욱 살아나는 인물군상, 캐리커쳐의 풍자적이고 익살스러운 느낌을 연상시키는 작품, 꼭두각시놀음에서의 홍동지 인형처럼 성기를 과장되게 표현한 작품, 그리고 달동네의 소박한 삶과 무기력한 희망이 담긴 작품 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과 형싱으로 다가선다.

여기서 과감한 채색과 공예적 표현은 현대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에 저급한 예술로 구분됐던 순수예술의 공예적 표현이 서슴치 않고 사용됨으로써 더이상 이분법적인 예술의 가치구분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기획전은 그 기획과 전시과정에서 몇가지 우려되는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는 작훔의 미적 형식에 대한 논의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자가 표면적으로 제시한 ‘일러스트’의 개념이 자칫 관객의 다양한 자유로운 시각을 억압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기획자는 작품의 명확한 의미전달을 강조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의 예술적 대안인 ‘일러스트’라는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일러스트의 개념은 정보전달이라는 측면이 전부가 아니며 예술을 일목요연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제시한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쉽고 친근한 조각들을 굳이 일러스트 조각이라는 합성어를 만들면서 까지 따로 구별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즉 이 전시회의 기획자인 큐레이터 개인이 ‘일러스트 조각’이라는 합성어를 의도적으로 만들고 작품을 그 의도에 끼워 맞추어 관객에게 기획자의 필터를 통해 작품을 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

이는 ‘쉽고 친근함’을 준다는 미명 아해 관객과의 교감이 살아있는 작품을 채집하여 기획의 의도에 맞춰 박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쉽고 친근한 느낌은 관객들의 자율적인 몫이지, 결코 기획자의의도적 연출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와 함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작품 진열에 따른 문제점이다.

조각의 조형요소 중 공간은 조각을 3차원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회화에 ‘여백의 미’라는 것이 있듯이 조각은 입체로서 그것이 놓여지는 공간 뿐 아니라 그 입체적 공간이 호흡할 수 있는 발산적인 공간, 즉 실공간과 허 공간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의도 서남미술전시관의 공간은 빈틈없이 작품들로 꽉 채워져 마치 진열대 위에 놓인 물건처럼 보였다.

또한 조각은 촉각의 예술이다.

클래스 올덴버그의 표현을 빌자면 ‘눈을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쉽고 친근한 조각전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고 쓰여진 지시문이 여기저기 놓여져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를 더욱 벌어지게 한 점도 이번 전시회에서 아쉬운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현대조각의 진화적 양상은 예술의 본질을 불변하는 존재론적 실체성으로부터 해방시켜 비결정적 창조의 과정을 인정하는데서 그 기반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고정된’작품으로서 관객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보여지는 과정의 상황에 따라 관객은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대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 또는 기획작에 따라 작품에 대한 관객의 시각을 제한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작품은 그 자체로서 온전하게 관객들에게 열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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