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라고 우리는 더이상 반문할 수 없다.

천일야화로 목숨을 건진 세헤르자르의 이야기도, 생명을 바다로 던져가며 사이렌의 신비한 노래를 듣고자 햇던 뱃사람들의 이야기도 이젠 풍문처럼 낯선 것이 돼 버렸다.

90년대 이후 거대이념의 붕괴, 문화산업의 확장, 전자영상매체의 팽창 속에서 우리는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현실과 꿈 사이에 가교를 놓아주고 우리에게 잃어버린 태초의 언어를 가르쳐주던 문학은 더이상 우리를 울게 하지도, 웃게 하지도 않는다.

문학의 위기라는 웅성거리는 변죽에는 이러한 담론을 발생시킨 발생학적인 문화상황이 전제한다.

지금의 시대처럼 자본에 의해 문화영역의 지배가 확산되는 시대는 일찍 없었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보다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됐음을 뜻한다.

자본은 물질적 환경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영혼과 상상력마저 지배할 수 있는 정교한 문화적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출판자본이 이윤추구의 논리로 움직이고 대중추수주의 문학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이 시대에 순수문학비평지·문학무크지가 속속들이 창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범우사에서는 ‘한국문학평론’봄 창간호를, 민음사에서 ‘포에티카’봄 창간호를 냇으며 김영사는 ‘새로운’이라는 문학무크지를 , 도서출판 문화공간은 국내 최초 여성문학 계간지 ‘라 뽈륨’을 창간했다.

‘한국문학 평론’은 동시대창작품에 대한 총체적 망라와 비평을 그 주안점으로, ‘포에티카’는 메타비평, 새로운 비평이론을 목표로 한다.

또한 ‘새로운 ’은 젊은 문학인들의 글을 대상으로 도전과 실험의 미래문학을 시도하고 있으며 ‘라 뽈륨’은 여성문학 전문잡지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거대 서사의 침몰처럼 평론에서도 무림의 강호를 떠난 젊은 논객들이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자기 목소리를 찾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포에티카’의 출연은 만음사에서 젊은 비평가 2세대들이 새로운 소통의 장을 찾으려는 한 분파의 움직임인 듯하고 ‘새로운’은 김영사에서 장정일 사건을 계기로 출판사 측의 입장을 강변하며 장렬하게 전사할 문단의 투사가 필요하다는 자체 내 반성적 요구와 지면 확보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감도 없지 않아 잇다.

그런점에서 여전히 근친상간적 비평과 자기검열 부재의 문학이라는 의아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순수문예·평론잡지의 등장은 새로운 편집과 북 디자인 등으로 대중문화에 직접 뛰어들던 ‘이다’·‘리뷰’·‘이매진’·‘상상’등의 잡지 출현과는 좀더 다른 생존전략의 함의를 내포하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이다’나 ‘리뷰’등의 잡지들이 세계화와 문화중독시대에 살아남는 방식으로서 대중과 호흡하기로서의 몸바꾸기라면 ‘한국문학평론’·‘포에티카’등은 문학산업의 논리 속에서 대중과 단절을 오히려 자신의 미학적 자존심의 준거로 삼아 문학의 진정한 고유성으로서의 들어가기라 할만하다.

이것이 비록 한 웅큼의 문학 혹은 자기끼리 서로 어루만져주는 위무의 문학이라 할지라도 해석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전문적 문학집단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아니 오히려 미적 자율성이 모용당하고 대중들에게 버림받는 그고립의 운명이 문학의 미학적 자존을 유지시켜줄지도 모른다.

현실제도의 논리를 정면으로 배반하며 일어서려는 저항의 길이 문학의 실존적 조건이다.

문학은 자신의 죽음을 연기하고 죽음을 견디면서 오히려 죽음을 파먹고 되살아나는 역설의 꽃이기 때문이다.

순수문학평론지·문예지 출간에 대한 두번째의 진단은 좀더 저변적인 이유에서 살필 수 잇다.

80년대 이후 고학력의 양산으로 문학에서도 많은 학위소지자들이 나오게 됐다.

신춘문예에서 평론의 응모작이 급속도로 늘어난 사실은 그 수요와 공급이 ‘가속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97년도 중앙일보 신춘문예 응모작품분석에 의하면 작년의 경우 응모작품 중 평론이 15편에 불과햇던 것이 올해 평론 응모작이 56편이 됐다고 한다.

무려 4배나 증가한 셈인데 이것은 각 대학원 학위과정 및 소지자들의 수가 늘어낫다는 사실과 과거와 다르게 현장 비평이 얼마나 초관심의 대상이 됐나를 증명해준다.

비평의 창작자가 곧 수요자가 되는 양적 인플레 현상이라는 토대는 평론잡지의 새로운 출범에 어느정도 단단한 지지대가 되고 있다.

또한 한때 문학비편이 굉장히 활발하게 문단에서 성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전임자리를 얻지 못해 글에다 그들의 원을 풀던 때였다.

현재 학위소지자들의 과다한 양산과 적체도 평론잡지 활성화의 중요한 원인이 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앞세대와 달리 이제 문학은 누구나 알아야 할 교양수준이 아닌 소수집단의 대상이 돗다.

젊은 문학행위자들은 강호의 혈전지에서 빠져나와 소수의 세력화와 힘의 역량을 도모하며 문학의 ‘깊이’로 빠져들 것이다.

문학잡지의 분립화는 문학작품 해석에서 읽기의 다양성와 세분화·전문화를 가속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문학의 위기 속에서 도리어 활발히 창간되고 있는 이러한 문학평론잡지·문예지들을 단순한 자위적 행위로 보기보다는 문학에서 무언가 절박하게 건질만한 것을 찾는 ‘간절한 탐색’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일용의 대중과 천대와 일용의 고학력 적체가 잇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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