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

연극이 체직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얀은막위에 새겨지는 ,TV화면 저안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저절로 빨려들겠는데 바로 앞에서 호흡하고 있는 이들과 그들이 별여내는 일들은 영 어색하고 답답해서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연극은 영화나 TV보다 부담스럽다는 것인데, 수십발의 총알로 바바리 코트가 너덜너덜해져도 걸어나오는 주인공과 시속200Km의 떼제베위에서 악당과 치고 박아도 무사한 미남배우보다 2m남짓의 높이에서도 한발한발 계단을 내려와야 하느 배우가 도대체 왜 부담스러운 것일까. 그건 아마도 연극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일상이기 때문에,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꿈꾸기에 익숙해 있던 이들에게 새롭게 만나는 또다른 일상이 마냥 버거울 따름인것이다.

연극‘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0115는 그런 이들을 완전히 일상속에 묶어 버리고 만다.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엔 아랑곳하지 않고.... 막이 오르면 한 정신과 의사가 과대망상증에 걸린 자신의 환자를 이야기한다.

‘치매증상을 보이는 어머니, 방값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성화, 그말에 남편을 닥달하는 아내, 돈을 주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는 동생 민수, 게다가 동네 단란주점 사장과 놀아나는 아내’그 모든 현실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주인공 조만득은 자신을 재벌그룹 회장으로 여기는 ‘과대망상성 정신 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병원을 요양소로 ,담당의사를 주치의로, 간호사를 비소로 여기는 만득은 백지수표를 남발하며 현실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현실의 것이 아닌 꿈일 뿐이다.

민과장과 윤간호사의 치료가 그를 결국 세상으로 나서게 하지만, 현실로 나선 조만득의 눈앞엔 다 부서진 이발소와 달아난 아내, 버려진 어머니가 있을 따름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결국 어머니를 죽이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다.

줄거리와 주제의 식상함에도 불고하고 이 연극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랩과 전통음악이 절료하게 조화된 배경음막-여거서 연출자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수 있는데, 그는 현대음악으로 대표되는 랩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극의 밑바닥을 흐르는 것은 주된 정서인 ‘한’을 표현하는 전통음악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소비향락을 여실히 보여주는 TV광고 사용등이 극의 사실감을 높였을 뿐아니라 극의 흐름 사이사이 등장하는 코러스의 춤·노래가 비사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등 새로운 시도와 실험으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주목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식상한 줄거리와 주제가 아닐까?1970년대‘조만득씨’(이청준원작소설)가 1997년 서울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야 말로 이 연극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이 아닐까 하는 말이다.

“수천억대 황금과 소비문화, 대중영상매체 홍수 속에 속수무책 노출된 채 적응과 실패, 좌절을 경험해온 내게 이작품은 그동안 지녀왔던 고민이 정직한 반영”이라는 연출자 자신의 고백처럼 이 연극은 자본주의 향락과 소비행태속에서 상처받고 무너지는 또다른 ‘90년대 조만득’을 솔직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단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꿈꾸기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현실을 타개할 속시원한 해결책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단지 수정(돈대문에 순수한 사랑이 파멸된 여인)의 사랑이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조만득을 어루만져 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비칠 뿐이다.

차라리 미쳐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은 현실. 그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겨워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우직한 고집이 든든히 느껴지는 지금, 또다른 조만득일 수 있는 우리는 일상을 도피하기 위한 그 긴 꿈을 이제 그만 깨어야 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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