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 롱스타킹’이 TV 화면에서 보인 낯선 행위와 언제나 그렇듯이 계몽성을 앞세우며 그것을 제재하는 제도권력,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긴장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덧붙이는 대중들의 시선, 지금 이 세 개의 축이 뒤엉켜있다.

‘삐삐 롱스타킹’이 브라운관을 통해 보인 행위는 단순히 위학을 가장한 위선일 수도 있고, 그들이 이제가지 내뱉은 수많은 선언저인 발언들과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작위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또는 그들의 주장대로 흥에 겨운, 지극히 자연스러운 제스쳐일 수도 있다.

어쟀든 이러한 문화적인 일탈이 선정성을 획득하여 그것 자체가 또 다른 하나의 관성이 되는 상황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판단니 구체적이지 않고 그 판단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우선 그러한 일탈을 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문화는 현재의 제도적인 틀 속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일탈을 일단의 가능성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다.

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겨 무대 위에서의 몸짓을 옭아매는 권력을 다시바라보자.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라이브 고연에 있어 무대 위에서 펼처지는 뮤지션들의 몸짓은 그들이 부르고 연주하는 음악의 앞에 놓인다.

천박한 이분법이 되겠지만 대중음악에 관련된 문화상품의 소비를 시·청각적인 구분에 의해 두 방향으로 단순화 시켜보자. 이때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등의 시각적인 소비는물론 청각적인 것을 전제한 것이지만, 그와는 독립된 수용구조를 통한다.

즉 라이브 공연장을 찾는 음악팬은 단순히 실시간으로 연주되는 음악으로 좋아하는곡을 한 번 더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물론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의도를 가진 이들은 대부분 복제된 거짓 욕망에 의한 잉여적인 문화상품 소비자이다.

-무대 ㅜ이에서 음악과 같은 감성구조로 움직이는 ‘몸’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그리 저렴해 보이지 않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굳이 공연장을 고집한다.

그럼으로써 심장박동과도 같은 비트와의 공명감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만약 이때 무대 위에서의 행위가 억압된다면, 앰프에서 울려대는 비트는 무의미한 심장박동을 거듭하는 뇌사상태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이, 방에서 음반을 걸어 놓고 시각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공연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고, 그에 맞춰 헤드뱅잉을 하는 편이 나아보인다.

지극히 계몽적인 시선에 의해 억압당한 채로 이루어지는 공연은 공연자, 관객 모두에게 무의미한 굿판인 것이다.

무대 아래의 상황은 어떤가? ‘RockN" Roll Korea’라는, 그 명분만으로는 자칫 관 주도의 전국가적인 행사로 비칠지도 모르는 공연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지나치게 열광한다는 이유’로 공연을 몇번씩이나 중단시키고 나중에는 올림픽 역도경기가 벌어질 때처럼 천정의 조명을모두 켜고 원래 역도경기장인 공연장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음반과 라이브에서의 음악이 감상자의 감성에 공명하는 기제의 차이는 영화와 연극에서의 그것과 같다.

관객은 음반이나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두 기운을 공연장에서 느낀다.

하나는 무대위에서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몸’의 기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는 분명 타자화된 대상이지만 결국은 동질가으로 얽혀잇어 같은 리듬으로 ‘몸’을 같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제외한 관객들의 기운이다.

무대에서 관객으로, 관객에서 관객으로, 관객에서 다시 무대위로 흐르는 기운의 순환고리가 연결될 때 공연장을 부유하던 음악은 모든 행위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그런데 이러한 순환고리가 안전요원과 전경들의 눈에 의해 끊어진다면 언제가지나 관객들은 한 손으로는 현란한 플래카드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풍선을 흔들며 ‘오빠’를 외칠 수 밖에 없다.

‘공무원’들에게만 푸념을 늘어놓을 일은 아니다.

무대위에서의 몸짓들은 어떠한 형태의 강박이나 의도적으로 과잉된 감정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음악의 내적 성숙이 이뤄져야 하고, 그 음악의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을 만한 몸짓이 자연스레 그 뒤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오빠부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맹목적고 복제된 흥분에 의한 외침이 아닌, ‘주체적’인 것이라고 과장할 수 있을 만한 반응으로 공연자와 원활한 소통을 이뤄야 한다.

공연자와 관객 사이의 투명하고 진정한 소통을위해서, 혹은 일탈의 가능성을 위새허 우리는 조금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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